CBS 아나운서 신지혜(화학·87) 동문

 

CBS 아나운서 신지혜(화학·87) 동문

 

 ‘초등학교 1학년 어린이가 대학교를 졸업하기까지 걸리는 최소 시간, 16년. 그 16년이라는 시간 동안 같은 자리에서 하나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이어온 아나운서가 있다. 매일 오전 11시면 어김없이 ‘온에어’ 등에 불이 켜지는 CBS의 한 스튜디오에서 ‘신지혜의 영화음악(이하 신영음)’이 시작된다. 영화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영화음악을 들려주는 이 라디오 프로그램은 신지혜(화학·87) 동문이 제작과 진행을 모두 도맡아 해오고 있다. 1998년 2월부터 16년 동안 한결같이 신영음을 지키는 ‘신영음 지기’로 불리는 신 아나운서는 오늘도 역시 마이크 앞에 앉는다.

 

 1994년 CBS에 입사해 지금까지 아나운서 일을 계속하고 있는데, 방송 일을 하기로 처음 마음먹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지 궁금해요.
 어렸을 때 TV에 나오는 신은경 아나운서나 백지연 아나운서를 보고 정말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내재된 에너지, 카리스마 같은 게 있잖아요. 그래서 아나운서라는 직업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가지게 됐죠. 고등학교는 이과, 대학은 화학과를 선택했으니 대학생 때까지도 아나운서에 대한 동경은 막연하기만 했어요.


 대학에 입학해서 보니까 교내 방송국에서 국원을 모집한다는 거예요. 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성격이 너무 소심한 나머지 고민만 하다가 1, 2차 모집을 다 놓쳤어요. 그러다가 3차 모집 공고가 났고, 친구 두 명이 같이 지원서를 쓰러가준 덕분에 어렵사리 교내 방송국 보도부 기자가 됐죠. 취재를 다니고, PD와 함께 뉴스를 제작하고, 대담 프로그램에서 앵커를 하며 방송 일을 처음으로 했는데, 방송이라는 게 정말로 재밌는거예요. ‘나의 길이 이거구나.’ 할 정도로요.


 4학년이 돼서 졸업에 가까워지니까 취업을 생각해야 했죠. 그런데 그때도 여전히 방송이 하고 싶은 거예요. 방송 일이 가장 재밌기도 하고, 방송 아니면 할 게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4학년 때부터 뒤늦게 언론고시 공부를 시작하게 됐죠. 상식, 국어, 토플 같은 걸 공부하니까 학과 선배들은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그 후 여러 방송국 시험에서 몇 번 떨어지는 고배를 마시고 결국엔 아나운서가 됐어요. 대학 시절의 교내 방송국은 지금 제가 이 자리에 와 있게 한 결정적인 경험과 배움의 터였던 거예요.


방송이라는 꿈을 이룬 비결이 있다면요?
 일단 자신의 꿈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하고요. 그 꿈을 그냥 꿈으로만 간직한다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흔히 사람들은 ‘꿈은 이루어진다.’고들 하죠. 그런데 절대 그렇지 않아요. 꿈은 단지 꾸는 거지, 꾸기만 한다면 그걸 이룰 수 없어요. 꿈을 찾고 난 다음 단계는 꿈을 목표로 치환하는 거예요.


 대학 다니던 스무 살 시절에 다이어리에 적어놓은 말이 있어요. ‘방송은 나의 목표, 영화는 나의 꿈’이라는 건데 그 말이 실제로 이뤄졌죠. 우선 방송이 나의 목표였어요. 거기까지 도달하기 위해선 첫발을 어떻게 내딛어야 하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이런 걸 정하고 노력을 해서 이 자리에 오게 된 거죠. 영화는 아직도 꿈이에요. 내가 영화배우나 감독을 하고 있는 건 아니니까요. 그건 내 꿈일 뿐이고, 언제든지 지칠 때 마음을 놓을 수 있는 도피처 같은 꿈인 거죠.


 어떻게 보면 목표를 통해 꿈에 조금 가까워지기도 했어요. 영화음악 프로그램을 진행하다 보니까 칼럼 제의도 받고, 가끔 영화제 심사위원도 맡고, 영화 몇 편에 DJ 역할로 목소리 출연을 하기도 했죠. 하고 싶은 일을 목표로 삼고 나니까 거기서 파생돼서 저의 꿈인 영화에 관한 다른 의뢰가 들어오기도 했던 거예요.


 또 하나 전하고 싶은 건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이 해주셨던 말이에요. 선생님이 한자로 크게 ‘도모’라고 쓰고 ‘일을 도모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목표를 이루기 위해 계획하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하셨어요. 우리가 도모한다고 해서 모든 일이 다 이뤄지진 않죠. 하지만 도모하지 않아서 이뤄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선생님은 말씀하셨어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서 얻어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무언가를 꿈꾼다면 그 꿈을 목표로 전환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구체적인 계획을 짜고, 또 그걸 해내기 위해 실제로 노력하는 것이 중요해요.


16년차 ‘신영음지기’가 신영음을 시작하게 된 과정은 어땠는지 듣고 싶어요.
 1995년 12월 CBS에 음악FM이 처음 생겼어요. 그때는 영화음악 프로그램이 주로 심야시간에 편성됐는데요. 평소 영화에 관심 있던 제가 일주일에 한 번, 밤 열 시부터 두 시간 동안 방송하는 영화음악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았어요. 배창호 감독이나 강제규 감독 등 나이가 좀 있으신 영화 감독들과 함께 영화 얘기를 하면서 1년 정도 재밌게 방송을 했어요.


 곧 영화음악 프로그램은 매일 오전으로 시간대를 옮기게 됐어요. 배우 오정해씨가 진행을 맡았다가 1년 조금 못 돼 임신하면서 그만뒀고, 배우 추상미씨가 4개월 정도 진행하다 드라마 촬영에 들어가게 되면서 떠났어요. 갑자기 이 프로그램을 진행할 사람이 필요해졌는데, 마침 저에게 하라고 한 거예요. 1998년 2월 2일에 신영음이란 이름을 걸고 첫 방송을 했어요. 한 달쯤 지나서는 1인 제작을 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죠. 저는 조직에 속해 있는 사람이니까 그걸 따라야 하기도 하고, 어차피 기계 조작이나 제작도 대학때 방송국에서 다 해봤던 거라서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시작했어요.


 먼저 PD로서 신영음의 방향을 어떻게 잡을지 고민했죠. ‘내가 청취자라면 듣고 싶은 영화음악이 뭘까’를 생각하게 됐어요. 그리고 아나운서로서는 멘트를 어떻게 전하고 사연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연구해 방송을 진행했어요. 마침 영화에 관심이 많고 영화음악을 자주 듣기도 했으니까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할 수 있었던 거죠. 매일매일 오프닝과 코너 원고를 쓰고, 방송도 하고, 기계도 조작하다 보니까 벌써 시간이 이렇게 쌓였네요. ‘프로그램을 직접 제작하는 아나운서’라고 해서 밖에서는 ‘아나듀서’라는 신조어를 만들기도 했는데, 사실 방송국 안에서는 ‘신영음 지기’라고 불리는 편이에요.
 

신영음을 지금까지 이어오면서 고비를 겪은 적이있나요?
 고비는 굉장히 많았죠. 아나운서란 직업을 밖에서는 준연예인 급으로 보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그렇지 않아요. 아나운서들은 스스로를 3D직종이라고 말해요. 긴장감 때문에 온에어가 켜지기 직전의 스트레스가 굉장히 크거든요. 또 에너지를 쏟아서 발성을 쭉 해야 하기 때문에 앉아서 말만 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실제로 육체적인 힘을 많이 쓰는 직업이에요. 게다가 건조하고 냉정한 사람보다는 감성적이고 섬세한 사람들이 주로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을 맡는데, 감정 기복이 심하더라도 방송에서 그걸 티낼 수가 없어요. 내가 우울하다고 해서 “안녕하세요, 신지혜의 영화음악입니다. 음악이나 들으시죠.”라고 할 순 없는 거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아나운서는 감정 노동자이기도 해요.


 그런 점들이 어렵고 힘들긴 한데, 저는 항상 그럴 때마다 스스로에 대한 질문을 던져요. ‘혼자 방송하는 것도 정신없이 힘들고, 몸도 너무 아픈데 다 때려치울까?’ 이런 생각이 들면 나 자신에게 ‘넌 아직도 방송하고 싶니?’라고 물어봐요. 그때마다 돌아온 대답은 ‘아직도 가슴에 사무치게 방송이 하고 싶어.’예요. 아직까지는 방송 일이 너무나 사랑스러운 거예요. 예전에 새벽 근무할 때는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기를 5년이나 반복했고, 그러다 보니 몸이 많이 망가지기도 했죠. 하지만 저는 아직도 방송이 하고 싶고, 저를 기다려주는 청취자들과의 교감이 주는 짜릿함 때문에 이 자리를 못 떠나고 있어요.


 2006년은 특히 일을 그만둘까 고민됐을 정도로 몸이 너무 아팠어요. 짧은 5분 뉴스를 하는데도 계속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도 우린 안 아픈 척하고 말을 계속 해야 하죠. 새벽 근무를 하고 계속 쉬지를 못하니까 몸이 굉장히 아팠는데, 마치 그에 대한 보상이라도 되는 듯 큰 상을 받았어요. 한국아나운서연합회 대상과 한국방송대상 아나운서 부문 올해의 방송인상인데, 사실 아나운서로서 받을 수 있는 큰 상은 이것 두 개뿐이라고 할 수 있어요. 2006년은 정말로 몸이 아파서 힘들었으면서도 너무나 영광스러웠던 해로 기억되네요.


신영음 청취자들의 사연 중에서 어떤 사연이 가장 기억에 남으시나요?
 몇 년 전에는 같은 질문을 받으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몇몇 에피소드를 얘기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그날그날 들어오는 사연과 신청곡을 들으면서 딱 저와의 교감이 느껴지는 사연들이 있어요. 몇 줄의 문장만으로 이뤄진 사연이지만, 감정의 교감이 같이 느껴지는 사연들인 거죠. 그런 사연이 있었던 날들이 내 기억 속에 별처럼 박혀있는 거예요.


 정말 신기하게도 내가 힘들 때에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될 만한 사연이 오는 경우가 있어요. 그 사람들은 내가 지금 아픈지 슬픈지 모르죠. 그런데도 어떤 사연은 가끔 저에게 큰 위로가 돼요. 그러면 그걸 힘으로 삼아서 방송을 하는 거죠.


 이번 주 방송 중 기억에 남는 사연을 꼽자면, 지난 18일(월)의 사연 중에 다음날이 어머니 환갑이라는 청취자가 있었어요. 그런데 어머니 성함이 ‘김자’라고 하시는 거예요. 이름 중간에 있던 ‘명’이나 ‘순’을 빠뜨린 게 아닌가 싶어 직접 전화로 여쭤봤죠. 정말 어머니 성함이 ‘김자’라는 답변이 돌아왔고, 그걸 알게 된 후에야 생신을 축하드린다는 멘트와 신청곡을 들려드렸어요. 방송 중에 다시 전화를 해서 확인하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거든요. 성함이 독특하셔서 그런지 이 날 사연 중에 가장 기억에 남네요.


마지막으로 이 질문을 드리고 싶어요. 신지혜에게 신영음이란?
 후배들한테 반 장난으로 ‘신영음에는 나의 청춘과 건강을 쏟아 부었다.’고 얘기하곤 해요. 그게 사실이죠. 내가 처음 시작을 해서 지금까지, 건강했던 몸이 골골거리기까지 청춘과 건강을 다 쏟아 부었으니까요. 신영음은 제게 그런 대상이에요. 청춘과 건강을 모두 바친 만큼 나의 열정과 에너지를 아낌없이 내놓았던, 애착이 많이 가는 존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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