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일기)을 편찬할 때는 사관의 사초와 각종 공문서를 추려서 초고를 만드는데, ‘초초-중초-정초’ 순으로 진행된다. 이후 활자로 간행하고 편찬에 소용된 자료는 세초를 하므로 우리는 간행된 자료만 보게 된다. 즉 실록이 완성되면 편찬에 사용된 사초 등을 물에 씻어 비밀을 보장하고 또 재생 용지로 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우리는 실록의 완성본만을 볼 수 있는 것이고 사초는 볼 수가 없다. 예외적으로 ‘광해군일기’는 중초본과 정초본이 다 남아 있어서 원래 기록에서 어떤 기록을 빼려고 했는지를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자천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스스로 천거한다는 말이다. 이는 사관의 관직 임용과 관련된 제도이다. 그러나 자천을 통해 임명된 사관들이 기록을 정확히 남겨도 그것이 편찬 과정에서의 공정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실록은 사초 등 기록을 남겼다가 국왕이 죽은 뒤에, 그러니까 얼마간의 세월이 흐른 뒤에 모아서 편찬하기 때문에 기록자와 편찬자가 일치하지 않는다. 이 불일치 때문에 실록 편찬에는 언제나 긴장감이 흐르기 마련이었다.


   조선 초 ‘태조실록’이 세종대왕 후반에 이르러 수정됐던 적이 있었다. 건국 초기의 정보가 부족한 것을 보완한다는 게 취지였지만, 실제로는 건국 과정의 합리화라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한 번 편찬된 실록이 다시 수정된 경우는 없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선조실록’의 수정은 무엇보다 인상이 좋지 않다. 손을 댄 실록이라는 것이다.


   ‘선조실록’의 수정은 기록의 보완과 사론의 수정이라는 두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수정을 위한 ‘범례’를 확정했다. ‘선조실록’과 수정본의 기사를 비교하다 보면 이러한 일반적인 보완 기사와는 달리 몇몇 사건을 중심으로 보완이 이루어졌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범례’는 14개의 조가 있는데, 12조를 보면 “도움이 되지 않는 번잡하고 쓸 데 없는 문자는 참작해 다듬어서 간결하고 압축적인 문장이 되도록 힘쓴다”고 되어 있다. 실록을 수정한 점과 12조의 경우를 보면 사관들이 얼마나 융통성이 있었는지를 발견할 수가 있다.


   조선시대 실록편찬자들이 왜 이렇게 융통성을 발휘해가며 실록을 수정하고 수정을 위한 ‘범례’까지 만들어서 작성했는지 그 이유를 기억해주었으면 한다.

저작권자 © 숭대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