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들장애인야간학교 박경석(사회복지·91) 교장

▲ 노들장애인야간학교 박경석(사회복지·91) 교장
  ‘혜화역 근처에 있는 노들장애인야간학교(이하 노들야학)에서 인터뷰이를 만나기로 한 날, 그를 찾았지만 학교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그에게서 한 통의 문자가 왔다. “여의도에 있어요. 이룸센터” 당황하긴 했지만 혜화에서 여의도가 먼 거리도 아닌지라 국회의 사당역에 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이룸센터에 도착하자 건물 앞에는 농성을 위한 흰색 텐트가 마련돼 있었다. 영하 6도의 날씨에 찬바람까지 쌩쌩 부는 날 그는 장애인들과 함께 “장애인 연금 공약이행! 장애인 등급제 폐지!”를 외치며 그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투쟁하고 있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이자 노들야학 교장인 박경석(사회사업·91) 동문을 만났다.

 

잘 놀다 죽는 것이 꿈이었다
  인터뷰를 가기 전 그의 책 『지금이 나는 더 행복하다』를 읽으며 박경석 동문이 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집안에서 아무도 술을 좋아하지 않고, 잘 마시지도 않는데 나는 아무래도 돌연변이인 것 같아요.” 그가 술을 좋아하는 이유? 그런 건 없었다. 그냥 좋단다. “고등학생 때부터 술을 마셨고, 아직도 술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대학시절 그의 학점 평점은 빵점에 가까웠다.

  영남대 문화인류학과에 재학 중이던 그는 1학년을 마치고 해병대에 자원입대하게 된다. 당시에는 대학 재학 중에도 군사 훈련을 받아야 했다. 교관은 그가 머리를 깎지 않았다는 이유로 때리기 시작했고, 화가 난 그는 군사훈련장을 박차고 나왔다. “1980년 당시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 독재 정권에 반발하며 군사 훈련을 거부하는 대학생들이 많았는데 저는 그런 이유로 거부한 건 아니었어요. 단지 군사 훈련을 받기 싫었던 거죠.” 군사 훈련을 거부하는 바람에 강제징집 명단에 그의 이름이 올라가게 됐다. 하지만 군대에 강제로 징집되기는 싫었던 나머지 그는 징집되기 전에 해병대에 지원해 입대했다.

 

행글라이딩 추락사고, 장애를 가지다
  해병대를 제대한 후 그는 대학에 복학했다. 공부에는 여전히 관심이 없었다. 대신 호기심이 많았던 그는 당시 전국에 몇 없던 대학 행글라이더 동호회에 가입했다. 해병대에서 낙하산 훈련도 받았던지라 하늘을 그리워했던 것도 있었다.

  그렇게 행글라이딩을 배웠고, 그는 전국대학생 행글라이딩 대회에 참가했다. 행글라이딩을 하기 위해 경주 토함산에 올랐다. “행글라이더가 무겁고 크기 때문에 두 명이서 행글라이더 하나를 들고 산을 올라야 했어요.” 이내 그는 산꼭대기에 도착했고 그보다 선배가 먼저 행글라이더를 탔다. 그런데 차마 이륙하기도 전에 나무에 걸리는 사고가 발생했다. “선배가 불안해서였는지 타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무더운 여름날 그 무거운 행글라이더를 지고 다시 내려갈 생각을 하니 막막했어요.” 그는 조금 부서진 행글라이더를 고치고 토함산 하늘을 향해 비상했다. 이륙은 잘 됐지만 곧 행글라이더는 산 속으로 처박혔다. “아찔했어요. 떨어지는 순간 정신을 잃어 어느 높이에서 떨어졌는지도 몰라요.”

  그가 눈을 떴을 때는 응급차 안이었다. 사고직후 그는 바로 경주의 한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치료가 어렵다는 이유로 영남대학교병원으로 후송되는 중이었던 것이다. 그는 하반신과 척추를 다치는 바람에 큰 병원에 가야 했고, 결국 서울대학교병원까지 가게 됐다. 이후 그는 6개월 동안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는 하반신 마비를 면치 못했다.

 

현실도피를 위해 5년 동안 두문불출
  하루아침에 장애인이 돼 버린 그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항상 바깥으로 놀러 다니는 것을 좋아했던 그였기에 충격이 더 컸다. “하루하루가 무감각했어요.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왜 사는지도 알 수 없었죠.” 그는 휠체어를 타고 바깥세상으로 나갈 용기가 없었다. “내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싫었죠.”

  그는 자괴감에 빠져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갔다. “하루 종일 집에서 텔레비전만 보고 있었어요. 5년 동안 뭘 했냐고 묻는다면 해줄 말이 없어요. 무감각했고, 시간은 정말 느리게 지나갔어요.” 그는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끝내 그는 자살을 생각했다. “집에는 부모님이 계셨기 때문에 차마 집에서 죽진 못하겠더라고요. 대신 고향인 대구에 내려가 죽을 것을 각오했어요.”

  하지만 그는 대구까지 내려갈 차비가 없었다. 어떻게 차비를 마련할까 고민하던 중에 매형이 그에게 성경을 100번 읽으면 용돈을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그는 그렇게 택시비를 마련하기 위해 성경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를 세상에 나오게 한 성경과 영어 선생님
  성경을 100번씩 읽다보니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이하 UBF) 모임에 자연스럽게 나가게 됐다. 여름이 찾아왔고 그는 UBF 여름 수련회를 가게됐다. 그는 수련회에서 용기를 내 그가 겪은 고통과 상처에 대해 사람들에게 털어놓으며 어느정도 마음의 상처를 치유받을 수 있었다. 이후 수련회에서 그의 얘기를 들은 한 여성이 그에게 영어를 가르쳐주고 싶다며 편지를 보내왔다. “서울대 대학원 영문과를 졸업한 사람이었는데 주말마다 집에 찾아와 저에게 영어를 가르쳐 줬어요. 가끔씩 맛있는 밥을 사주기도 했죠.”

  재밌는 것은 그에게 영어를 가르쳐 준 영어 선생님이 형수님이 됐다는 사실이다. 둘째 형이 영어 선생님에게 프러포즈를 한 것이었다. “제 영어 선생님이었던 분이 형수님이 되니까 재밌었어요. 덕분에 인생을 살아가는 게 즐거운 일이라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됐죠.” 그는 그렇게 성경읽기를 통해 만난 영어 선생님을 통해 다시 세상으로 조금씩 발을 내딛었다.

 

쉽지 않은 장애인의 세상살이
  밖으로 나오니 세상은 사고 이전과 많이 달랐다. 비장애인이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비로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동하는게 가장 불편했죠. 하지만 그건 물리적으로 불편한 것이었고, 무엇보다 사람들의 시선이 가장 불편했어요.” 그가 장애인이 되니 아무래도 장애인들을 많이 만나게 됐다. “장애인이 되고 나서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장애인이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한국에만 약 251만 명의 장애인들이 살고 있죠. 도대체 그 많은 장애인이 어디에 숨어있는지 궁금했죠.”

  그가 보기에 사회는 도저히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더불어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었다. 당시에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이 대다수였고, 버스와 지하철에도 장애인을 위한 시설은 없었다. 무엇보다 장애인을 피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인식이 문제였다. “복지도 형편없고, 사람들도 싫어 하는데 어떤 장애인이 밖에 나오는 걸 좋아하겠어요. 251만 명의 장애인들이 왜 여태까지 숨어있었는지 알겠더라고요.”

 

숭실대 사회사업학과에서 다시 학문을 닦다
  그는 사고 이후 대학을 자퇴해야 했다. 하지만 취업을 위해선 대학 졸업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그는 대입을 준비해 1991년 숭실대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하게 됐다. “준비하는 과정이 쉽진 않았죠. 하지만 대학을 꼭 가야겠다는 마음이 간절했어요.”

  동기들과 10살이 넘게 차이가 났지만 그는 나름대로 학과 생활에 잘 적응했다. “동기들과 같이 술도 마시고 재밌게 놀았어요. 제가 친화력이 좋았다기보다 그 친구들이 저를 잘 받아줬어요.”

  당시 숭실대가 언덕 위에 있었기 때문에 그가 캠퍼스를 돌아다니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 수업하는 교실이 1층이 아닌 데다 엘리베이터도 없어 더 불편했다. 하지만 동기들이 항상 그를 옆에서 도와줬다. “동기들에게 너무 고마웠죠. 그렇게 매번 도와주는 것도 쉽지 않은데 말이에요.”

 

노들야학의 교장이 되다
  숭실대를 졸업한 후 그는 성남의 한 장애인복지관에서 직장을 구했다. 그는 또 장애인학교인 노들야학에서 교사로도 일하고 있었다. 안정적인 직장도 중요했지만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두 가지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환경이 만들어지더군요. 한참을 고민했어요. 복지관에 남는 게 훨씬 안정적이긴 했죠. 하지만 그렇게 안락하게만 인생을 살 순 없었어요.” 그래서 그는 노들야학의 교사가 되는길을 택했다.

  그가 노들야학 교사로 일하던 1994년, 2대 교장이 개인적인 이유로 사퇴하는 바람에 교장 자리가 공석으로 남게 됐다. “왠지 어느 날부터인가 ‘내가 교장을 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노들야학을 사회에서 반드시 필요한 존재로 키워야겠다는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료들에게 제가 교장이 되면 어떻겠냐고 물어봤죠. 그런데 다들 해보라고 대답하더군요.” 결국 그는 그렇게 노들야학의 교장이 됐고, 지금까지도 그는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교육조차 받지 못했던 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도 공부다
  노들야학은 학문만 가르치지 않는다. 어떻게 세상과 싸우는지도 가르친다. “저는 학문을 갈고 닦는 것만이 공부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건 편협한 의미에서의 공부죠. 아직까지도 많은 장애인들이 자신에게 어떤 권리가 있는지조차 모르고 살아가요. 그들이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얻기위해 투쟁하는 것도 공부라고 생각해요.”

  그는 지난달 28일(목)부터 장애인 등급제 폐지와 장애인 연금 공약 이행을 요구하는 농성을 시작했다. “농성은 언제 끝날지 몰라요. 우리 요구를 누군가 들어주는 날이 오길 바라고 있어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게 자연스러운 사회를 만드는 것이 꿈이라는 박경석 동문은 지금 이 시간에도 장애인의 권리를 찾기 위해 교육하며 투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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