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스덴 프라우엔 교회는 부활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게 해준다.
폴란드의 바르샤바가 나치 독일의 침공으로 쑥대밭이 되었다면 히틀러가 가장 사랑했던 이 도시는 영국 공군의 폭격으로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했다. 폭격은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았고 폭탄 투하를 지시한 사람은 전승국의 장군이라는 이유만으로 영웅이 되었다.

전쟁의 승리와 패배는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도 영웅이 되느냐 전범이 되느냐의 기준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에 난 동의할 수 없다. 인간만이 가장 어리석은 선택과 기준을 만들어 반복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수없이 반복하는 전쟁이라는 이름의 자멸(自滅). 고통을 충분히 경험하고도 또다시 고통을 만들어 내는 어리석음은 인간만의 속성이다.

전쟁은 공격과 방어라는 두 가지 속성으로 간단히 해석될 수도 있지만 그 상처는 우리의 뼛속까지 태워버린다. 드레스덴은 이미 영화 용어가 되어 우리에게 친숙한 ‘블록버스터(Blockbuster)’ 의 의미를 되새기게한다. 한 블록 전체를 날려 버리는 폭탄, 생각하기만 해도 끔찍하다. 드레스덴 중앙역을 나와 무미건조한 현대식 건물을 10분 정도 지나치면 노이마르크트(Neumarkt)광장이 나온다. 이 광장 입구에서 블록버스터의 파괴력과 부활의 의미를 동시에 느끼게 해 주는 프라우엔(Frauen Kirche Dresden) 교회를 떨리는 마음으로 바라본다.

프라우엔 교회는 전소(全燒)됐다. 엘베강가에 있는 이 찬란한 교회야말로 드레스덴의 상징이었고 종교개혁의 정점이었다. 드레스덴 시민의 자부심이었던 교회가 타서 없어진 것은 도시의 죽음을 의미했다. 사람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교회의 잔재 하나하나에 번호를 매기는 것이었다. 어리석은 인간이 그래도 만물의 영장인 것은 죽음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리라. 번호를 매겨 보관했던 작은 돌들은 프라우엔 교회의 부활임과 동시에 드레스덴의 부활을 알렸다. 이제는 교회 앞에 세워진 마르틴 루터의 동상과 함께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 중 하나가 되었다.

폭격일로부터 70년이나 지났지만 드레스덴은 아직도 부활의 역사를 계속 써가고 있다. 통일 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동독지역의 암울한 사회적 분위기도 걷어내고 낙후되었던 도시의 기반 시설도 계속 정비해 나가고 있다.

뮌헨, 함부르크, 쾰른, 슈투트가르트 등 독일의 유명하다는 도시는 거의 가보았다. 하지만 드레스덴과는 인연이 없었다. 그저 늘 그리던 프라하로 들어가기 전에 잠시 머물 수 있는 도시로 생각했다. 체코의 길목에서 마지막 독일 맥주를 즐길 수 있는 낙후된 동독의 도시로 여겼다. 그러나 드레스덴에서 나는 부활의 의미를 되새겼고 전쟁을 일으킨 인간의 일면을 저주했고 새로운 희망을 쏘아올린 인간의 다른 일면을 찬양했다.

스스로 무능하다고 자학하는 사람들에게 드레스덴을 권한다. 드레스덴은 찬란했지만 없어졌고, 없어졌지만 다시 찬란해진 무한한 힘과 가능성을 보여줄 것이다. 드레스덴을 독일의 피렌체라 부른다. 하지만 이 말이 더 어울릴 것 같다. 드레스덴은 ‘독일의 매화(梅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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