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진형(吉鎭亨 1891.2.19.-1917.10.13.)과 길진경

길선주의 장남 길진형과 차남 길진경은 숭실에서 서양학문을 배우며 민족운동의 싹을 틔웠다. 평양에서 출생한 길진형은 어려서 사서삼경을 수학했으며, 아버지의 뜻에 따라 숭실중학에 입학하여 1907년 제4회로 졸업했다. 이어 숭실대학에 진학하여 1911년 제3회로 졸업했다. 길진형의 숭실중학·숭실대학 2년 후배인 박윤근은 그의 학생생활에 대해 “길선주 목사의 장자로서 얌전하고 생김새도 깨끗하고 재주가 있어서 숭실에서 인기 많은 스타였다”고 회고했다(1975년 평양 숭실동문 좌담회).
길진형은 숭실대학 졸업 후 매퀸(G. S. McCune, 尹山溫) 교장의 추천으로 선천의 신성학교에서 수학과 성경을 가르치며 후학 양성의 길을 걷다 105인 사건으로 투옥된다. 1907년 4월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조직으로 설립된 신민회에 가입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한 것이 주된 이유였다. 일제는 신민회가 무관학교 설립 및 독립군기지 창건운동을 벌이자 이른바 데라우치(寺內) 총독 암살미수사건을 조작하여 신민회를 탄압하고 서북지역 기독교인들을 대거 체포했다. 길진형도 이때 체포되어 징역 5년형을 선고 받고 장기간 일본 경찰의 고문에 시달려야 했다. 일경은 추운 겨울에도 발가벗겨 천장에 매단 후 전신 구타를 하는 등 살인적인 고문을 자행했다.
길진형은 1912년 9월 28일 경성복심법원 공소심 이후 105인 중 6명을 제외한 99명과 함께 석방됐고, 다시 신성학교 교단에 섰다. 그러나 계속되는 일제의 감시와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만주 안동으로 피신하였다가 미국으로 갔다. 공부하도 하고 휴양도 하고 일제의 감시를 피할 목적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안창호 등 민족지도자와 구국활동을 했고 국어강습소를 열어 교포 교육에 전념했다. 하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악화된 병을 극복하지 못했고, 결국 1917년 신병 악화로 귀국길에 올라 평양에 도착했으나 곧바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길진형의 독립행적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편 길진형의 동생 길진경은 1902년 평양에서 출생하여 형을 따라 숭실중학에 입학, 1919년 제15회로 졸업했다. 숭실대학에 입학했으나 3·1운동에 참가하여 투옥됨에 따라 졸업하지 못했다. 당시 길진경의 경우처럼 숭실대학에 입학했으나 민족운동에 연루되었거나 또는 엄격한 학사관리나 가정형편으로 인해 졸업에 이르지 못하는 학생이 절반을 훨씬 상회했다.
길진경은 3·1운동 민족대표인 아버지 길선주 목사를 도와 만세시위를 주동한 혐의로 체포되어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출옥 후 중국 남경으로 망명하여 금릉(金陵)대학에서 교육학을 공부했고 1933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아 평양노회에서 활동했다. 신사참배 문제가 불거졌을 때 잠시 교역을 떠나기도 했지만 1941년 만주 통화현 교회에 부임하여 8·15해방을 맞았다. 해방 직후 공산당에 체포되어 1년 4개월의 옥고를 치렀으며 월남 후 목회 활동 및 미국 유학을 거쳐 한남신학교 교장, 1960년 기독교장로회 총회장, 1961년 한국기독교연합회 총무로 활동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