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수), 본교 한경직기념관에서 한경직 목사 소천 14주기와 서울 숭실 재건 60주년을 기념하는 교회와 민족의 지도자 한경직 목사 강연회가 열렸다. 이번 강연회에는 △개신교 △불교 △성공회교 △원불교 △천도교 △천주교의 종교인들이 모여 한경직 목사의 삶을 회고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렇게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이 말하는 한경직 목사에 대해 들어보자.

 

  손봉호 교수 (서울대 명예교수,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설립자)

  한경직 목사님은 성경이 제시하는 ‘항상 낮고 겸손한’ 지도자의 전형이었습니다. 한국기독교총연명의 탄생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으면서도 그는 회장직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잔치의 상좌에 오르지 말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충실했고, 낮아져야 높아진다는 진리를 몸소 증명한 것입니다.

  더해 철저한 무소유의 삶을 사셨습니다. 많은 설교와 강의를 했지만 보수를 전혀 받지 않았고 교회가 건축한 은퇴관을 사양했습니다. 은퇴관 대신 비좁은 남한산성의 거처에서 여생을 보냈고 돈 한 푼, 땅 한 평도 자녀들에게 남기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대형교회를 이룩한 성직자들 상당수가 자녀에게 교회를 물려주고 있지만, 한 목사님의 아들은 영락교회를 물려받지 않고 미국에서 목회를 함으로써 아버지에게 어떤 도움도받지 않았습니다.

  한 목사님이 이런 인품과 가치관을 갖게 된 것은 유학시절에 앓았던 폐결핵 때문입니다. 당시 폐결핵은 오늘날의 암보다 더 무서웠기에, 결핵에 걸리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결핵에서 회복되자 한 목사님은 그것이 오직 하느님의 은혜 때문이고 그 후의 삶은 덤이라는 생각을 가지셨습니다. 그러자 돈과 명예 권력등은 그에게 사소해졌고, 이 생각이 한 목사님을 위대한 영적 지도자로 만들었습니다.

  한 목사님은 이렇게 신앙적인 삶을 사셨지만, 현재 한국 개신교는 많은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지난해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국민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개신교의 신뢰도는 21% 정도로 낮게 나타났습니다. 이런 신뢰도로는 좋은 내용을 아무리 열심히 가르쳐도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럴 때에 한 목사님이 살아계셨더라면 한국 개신교가 이 정도까지 신뢰를 잃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한 목사님이 떠난 지금, 살아 계셨을 때보다 그의 위치와 역할이 더 크게 느껴지고 종교 공동체에서 훌륭한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한 목사님을 한국에 보내주신 하느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 놓고 존경하고 쳐다볼 수 있는 모범이 있으며,우리 자신을 비춰보고 부끄러워 할 수 있는 거울이 있다는 사실은 정말 소중합니다.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를 잘 이용해 높은 교육적 효과를 얻었으면 합니다.

 

  법륜 스님 (평화재단 이사장) 

  역사적으로 어느 종교든 존경받는 훌륭한 분들이 계셨기에 그 종교의 전파에 큰 도움이 됐습니다. 불교의경우 신라시대에 순교를 한 이차돈 선생님이나 대중 불교를 전파한 원효 대사 같은 분들이 있겠지요. 또 최근엔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무소유를 실천하시며돌아가신 성철 스님이나 법정 스님이 계십니다. 천주교는김대건 신부님 등을 포함해 많은 분들이 순교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김수환 추기경처럼 천주교를 넘어서서 국민적으로 존경을 받은 분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개신교는 한국에 들어온지 이제 갓 100년 정도가 됐습니다. 이렇게 역사가 짧다보니 희생의 역사가 부족하고 국민의 존경을 받을 만한 분들도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개신교에 대한 비판도 상당히 많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한경직 목사님 같은 분들이 없었다면 개신교가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 목사님이 보여주신 신앙인으로서의 자기 수양은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목사님의 삶을 널리 알리고 기리면 개신교의 이미지를 새롭게 개선하고 좋은 뜻을 전달하는 데에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어떤 종교든 신앙심이 중요합니다. 불교의 경우 깨달음이 있어야 하고 개신교는 하느님에 의한 신앙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심이 없으면 종교가 세속화되기 쉽습니다. 한 목사님은 젊은 날 폐병에 걸려 죽음을 마주했던 체험을 통해 신앙심을 얻으셔서 성직자로서의 삶을 사실 수 있었습니다. 저는 과거에 수행을 하다가 ‘생사에 대한 경계가 없고 죽음도 두려울 게 없구나.’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죽음의 문턱까지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죽음이라는 것이 정말 장난이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내가 수양에 대해 너무 건방졌구나.’라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런 경험이 있어 제가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목사님도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하느님께 감사할 수 있다.’ 라는 마음을 갖게 해 주는 체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신앙을 평생 지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기와 재물이 많아지면 타락하고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하지만 한 목사님은 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었음에도 모두 외면하고 종교인으로써 청빈한 삶을 끝까지 지켜내셨습니다. 만 마디의 말보다도목사님의 이런 삶이 올바른 삶의 기준을 세워 줍니다. 여기 모인 이들 모두가 한 목사님을 거울삼아 살아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박경조 주교 (대한성공회 주교원 전 의장)

  평생 가난했지만 오직 약자만을 위했던 한경직 목사님의 생애는 현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많은 깨우침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자본주의의 폐해와 모순이 드러나고 있는 시대에 삽니다. 여기서는 무한 경쟁의 정글 속에서 강한 자만이 살아남고 약한 자는 뒤쳐지고 있습니다. 너도 나도 성공하고 살아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죠. 여기서 자유로울 사람은 누구도 없습니다.

  이런 시대에 예외적으로 ‘약한 자를 사랑하고 스스로 약한 자가 돼야 한다.’는 복음의 가치를 따라 살 수 있다는 것을 한 목사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사실 저는 자본주의의 가치가 팽배한 세상에서 ‘복음의 가치를 따라 살 수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항상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목사님의 생애를 보면서 ‘그렇다! 이것이 정말 우리에게 귀중한 가르침이다. 자신의 존재를 바쳐서 복음의 가치에 따라 살고자 한 신앙의 위대함, 이를 반드시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목사님은 가난하셨고 약하셨고 많은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하지만 목사님은 강하셨습니다. 그 강함은 권력과 힘으로 무장된 강함이 아니라 가장 약하고 어리석은 복음의 힘이었습니다. 한 목사님은 복음적인 삶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따라갈 수 있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증언해 주셨습니다.

  사실 한 목사님도 처음부터 야망과 명예욕에서 벗어나 오로지 하느님의 뜻을 찾는 길을 걸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자신 안에 있는 어둠과 죄악을 깨달았고 그것을 자신 안에품고 용기있게 하느님 앞에 나가 고백하고 기도하셨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유혹과 싸워나가셨으며 자신의 잘못을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 드러냄으로써 새롭게 변화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것이 가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응답해 가는 한 인간의 위대한 삶을 보면서 우리도 이처럼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저는 갖습니다. 목사님은 자신의 야망만을 위해 공부하던 젊은 날을 반성하고 변화해 마침내 위대한 신앙인의 풍모를 보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런 목사님의 삶에 대해 깊은 경애를 표하고 싶습니다.

 

  박남수 선도사 (천도교 교령, 한국종교연합 상임대표)

  저는 한경직 목사님의 삶을 통해 여러 배움을 얻었으나, 이 중 세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신앙 체험입니다.

  한 목사님은 1924년 여름 황해도 구미포 해변에서 ‘하느님의 부름’을 받으신 적이 있습니다. 이 신앙 체험은 우연히 일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저는 이 체험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기도와 수양을 통해 오랫동안 쌓아왔던 수행의 결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한 바람이 아닌 정성을 다한 수양에 하느님이 감응하신 것이죠. 이후 한 목사님은 신학을 더 공부하고자 미국 유학을 결심했는데, 제가 한 목사님의 신앙 체험에 주목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절대자와 만나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데서 그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출발점으로 삼아 배움의 길을 확장하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수행자의 길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제가 경배하는 천도교의 수운 최제우 대신사님과 해월 최시형 등 역대 스승님들의 삶에서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음 배움은 사람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한 목사님을 기르고, 또 한 목사님도 수많은 사람들을 길러냈습니다. 홍기주 선생과 우용진 전도사, 그리고 이승훈 선생 등은 한 목사님이 소학교와 상급학교에 진학하고이어 신학교까지 갈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그리고 한 목사님의 목회 활동에 감화를 받은 사람들과, 한목사님이 설립하신 여러 학교의 졸업생들도 수없이 많습니다. 한 목사님은 이 사람들 속에서 하느님을 만났고, 그 하느님을 섬겼으며, 그 하느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아오신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이를 통해 사람들이 없으면 하느님에게로 가는 기도는 이뤄질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마지막 배움은 시련입니다. 한 목사님은 어려서 친어머니를 여의고 궁핍하게 지냈으며 오산학교 졸업 후에도 일본 경찰에 의해 심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신학자가 되겠다는 포부를 안고 유학을 떠났으나 그곳에서 페결핵 3기를 선고받았습니다. 병을 간신히 치료하고 귀국했으나 그를 기다리는 것은 일제 강점기라는어두운 세월이었습니다. 하지만 한 목사님은 이 많은 시련에도 굴복하지 않고 의연했습니다. 이를 통해 저는 배웠습니다. 그것은 시련 속에 있는 신의 섭리를 읽으면 성공하는 것이고, 시련을 시련으로만 받아들여불의와 타협하면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이성택 교무 (원불교 원로교무, 원광대학 전 이사장)

  한경직 목사님의 기념행사에 이렇게 다양한 종교인들을 초청해 추모하는 일은 종교 간의 상생과 협력을이끌어 내는 계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이 행사가 더욱 의미 있을 수 있도록 한 목사님의 생애와 발자취를 더듬어 보려고 합니다.

  먼저 한 목사님은 교육을 통해 나라를 튼튼히 하는 ‘교육입국’을 몸소 실천하는 선구자였습니다. 한 목사님은 일찍이 서구식 교육에 눈을 떠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 신학원에서 공부를 하셨습니다. 1920년대에는 우리나라에게 서구식 선진 교육이 간절하던 때였습니다. 이런 민족의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 당신이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서구식 교육을 경험했다는 것은 그에게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이후 한 목사님은 영락고등공민학교에서부터 숭실대학에 이르기까지 많은 학교를 설립하시고 학생들을 가르치시는데 심혈을 기울이셨습니다.

  한 목사님은 나눔이라는 종교의 사회적 의무도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신의주 보린원을 시작으로 기독교 아동복지재단과 부산 다비다모자원 그리고 영락사회복지재단, 선명회 등 수 많은 사회사업 단체들을 설립하셨습니다. 이 중 선명회는 한 목사님이 한국 전쟁 고아들을 위해 일하기로 결심한 미국 선교사 밥 피어스와 함께 만든 단체입니다. 선명회는 수많은 전쟁 고아들이 새로운 삶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왔고, 지금은 월드비전이라는 명칭으로 많은 사회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한 목사님은 나눔의 실천으로 굶주림이나 고아 등 당시의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 혼신을 다하셨습니다.

  저는 한 목사님을 직접 뵌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웃 종교의 성직자이신 한 목사님을 늘 마음에 두고 살아왔습니다. 비록 같은 종교에 종사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분의 종교 활동은 늘 우리의 귀감이 됐고 우리는 한 목사님을 닮아가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김홍진 신부(천주교 서울대교구 쑥고개성당 주임)

  동시대에 훌륭한 어른이 함께 계셨다는 것은 많은 이들에게 힘과 용기를 줍니다. 그리고 기쁨과 자랑이기도 합니다. 우리 곁을 떠난 지 1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한경직 목사님의 삶의 여정은 이 땅의 많은 이들에게 따뜻한 온기로 남아 있습니다.

  한 목사님의 삶은 고난의 근·현대사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소년 시절 혹독했던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의 기쁨이 가시기도 전에 찾아온 분단, 그리고 비극적인 전쟁을 거치고 암울했던 군사독재 시대와, 뒤이어 찾아온 민주화까지 모든 시대를 사셨습니다. 이런 민족 아픔의 역사 속에서 한 목사님은 당신의 삶을 아프고 약한 이들을 위해 바치며 하느님의 부름에 충실히 응답하셨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담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처럼 한 목사님은 예수님의 마음을 온전히 당신 가슴에 담아 이웃을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자신에게 늘 성실하고 철저한 삶을 사시고, 상대방의 소리에는 항상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전도와 교육과 봉사라는 목자의 의무에 누구보다 충실하셨고 개신교단의 화합과 일치를 위한 노력에도 힘쓰셨으며 평생 청빈하고 겸손한 일생을 사셨습니다.

  사실 인간은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없기에 어떤 성인도 과오는 있습니다. 한 목사님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를 했다고 고백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잘못에 대해 공개적인 회개와 참회를 하고, 더 많은 봉사를 통해 하느님 앞에 올곧게 서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과오를 솔직히 인정하고 반성하고, 더 나아가 이를 극복하는 모습은 우리 같은 나약한 인간들에게 큰 귀감이 됩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는 큰 어른이 없다고들 합니다. 비록 지금 우리 곁에는 안계시지만 한 목사님은 시공을 초월해 큰 스승으로 남아 계십니다. 많은 이들이 목사님의 삶을 본받으며 더욱 올바르고 아름다운 사회를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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