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짜르트의 결혼식과 장례식이 치러진 성 슈테판 대성당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리스트, 체르니, 비발디, 슈만, 브람스, 그리고 대한민국의 안익태. 내 머리 속에 저장된 음악가의 이름을 하나씩 떠올려서 열거하자면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음악의 거장들에게서 공통점을 찾아내라고 한다면 답은 하나가 된다. 유럽에서 활동했던 모든 음악가들은 비엔나에서 살았거나 공연했다는 것이다. 비엔나를 말하지 않고 음악사를 논할 수는 없다. 사실 비엔나는 영어 이름이고 오스트리아의 공용어인 독일어로는 빈(Wien)이다. 하지만 나는 왠지 빈보다는 비엔나라는 이름에 익숙하다. 우리 주변에 빈이라는 이름보다는 ‘비엔나’를 수식어로 사용한 음식이나 레스토랑이 많아서 그런 것 같다. 우스꽝스럽고 말도 안 되는 비유지만 빈이라고 부르면 왠지 가난해 보인다. 발음상으로 가난할 빈(貧)을 떠올리는 나의 유치함. 그런데 비엔나에서 활동했던 예술가들은 대부분 가난하게 살다 생을 마감했다니 가난할 빈 자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도 아니다.

  지금은 소위 명품이라고 불리는 온갖 브랜드의 각축장이 된 그라벤(Graben)거리를 지나 모차르트의 결혼식과 장례식이 치러진 곳으로 더 유명한 성 슈테판 대성당(St. Stephan Cathedral)에 도착했다. 왜 천재라고 불리는 예술가들은 하나같이 젊은 나이에 요절(夭折)하는 것일까. 명작을 탄생시키기 위해 너무 많은 에너지를 집중해서 그런 것일까.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지만 비엔나에서 최고 전성기를 구가했던 모차르트는 비엔나의 아름다움을 서른다섯 살까지만 볼 수 있었다. 그의 공연은 매번 대성황을 이루었지만 정작 걸작을 만든 작곡가의 생활은 늘 빈곤했다. ‘신의 위대한 공평성, 평범하고 긴 인생, 특별하지만 짧은 인생.’ 슈테판 성당을 나오면서 내린 결론이다. 그러나 맘이 편한 것은 아니다.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과 비견되는 쇤부른 궁전을 보는 데는 꼬박 하루가 걸렸다. 한 때 유럽을 호령했던 합스부르크가의 일원이 된 기분으로 궁전 안에서 가다 서다를 반복한 덕분이다. 1,441개의 방을 가진 궁전은 방의 숫자만으로도 긴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하다. 시내에 있는 벨베데레 궁전(Belvedere Palace)으로 발을 옮겨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 앞에 서서 비엔나 여행의 정점을 찍는다. 사랑하는 연인의 모습을 이보다 애절하게 그린 작품은 없을 듯싶다. 미술과 음악은 최고봉에 서는 순간 그 경계를 무너뜨린다. 눈으로 보는 것과 귀로 듣는 것은 같은 것이 된다.

  궁핍하고 가난해서 하고 싶은 것을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핑계일 뿐이다. 적어도 비엔나에서는 그렇다. 천재들의 걸작 안에 내재한 고뇌와 노력을 보고 싶은 사람에게 비엔나 여행을 권한다. 명작은 어려운 환경을 극복한 이들에게만 주는 신의 특별한 선물이다. 이 도시 빈은 발음상 빈(貧)이 아니라 더 많은 예술작품으로 가득 차야만 하는 ‘빈’ 공간이 되어야 한다. 비엔나 교향악단을 지휘했던 안익태 선생의 발자취가 서린 이 도시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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