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실총동문회 부회장 박경대(영문·56)동문
  2014년 9월 15일 월요일 5지난 8월 대학발전기금으로 1억 원을 쾌척한 동문이 있다. 숭실총동문회 부 회장을 역임하면서 꾸준히 학교 발전을 위해 기금을 부여해온 박경대 동문(영문·56). 1956년 돌로 지어진 2층 건물에서 공부하며 숭실에 대한 자부심을 잃지 않았던 학생이 서울 숭실 60주년을 맞이해 거액의 발전기금을 기부하게 됐다. 서울 숭실 제2기 졸업생 박경대 동문의 이야기를 통해 그의 뜨거운 애교심을 확인하고 숭실에 대한 자부심을 다시 다져보는 기회를 마련했다.
 
  교육자의 삶을 사셨다고요.
 
  제가 어렸을때 페스탈로치 전기를 읽고 평생을 교육자로서 살기로 결심했어요. 이북에서 1947년부터 1년간 인민학교 교사로 근무했는데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핍박을 받았어요. 그래서 공부를 더 해야 된다고 생각해 시험을 보고 김일성대학에 입학했죠. 2학년을 끝마친 후 6·25전쟁이 발발해서 참전했고 그 이후에 부산에서 3년 동안 교회와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어요. 부산에 있을 때는 아직 숭실대를 졸업하기 전이었는데 평양신학교의 교장을 역임했던 채필근 목사님의 추천으로 대한신학교에서 2년간 영어를 강의했죠. 상경한 후에는 대광 중·고등학교에서 근무하면서 동시에 서울 장신대와 서울대 대학원을 야간으로 졸업하게 됐어요. 특히 영어를 더 잘 가르치고 싶은 마음에 서울대 대학원에선 영어교수법 석사과정을 수료했습니다. 1986년에 퇴직하고 서울 장신대에서 10년간 강의한 기간을 포함해 총 43년을 교육자로서 살아왔는데교직 생활 중에 부산에서 보낸 3년이 가장 힘들었지만 보람찬 기간이라고 생각해요.
 
  꾸준히 기부를 실천하셨는데요?
 
  기부의 이유라고 할 만한 것이 애교심이지 다른 이유가 있겠어요? 우리대학에 대한 애착을 항상 가지고 있어요. 조금이라도 돈이 생기면 학교에 기부를 해왔고, 앞으로도 꾸준히 적은 돈이라도 계속 기부할 생각을 하고 있어요. 제가 지금보다 젊었을 땐 우리대학이 축구 경기를 할 때 항상 경기장까지 찾아가서 관람하고 응원하러 다녔지요. 결과가 어떻게 됐든 간에 학교 대표로 경기를 뛴 선수들에게 회식비에 보태라고 적은 돈이나마 줬던 기억도 있고요. 그런데 이제 9학년이 되다보니까 건강이 문제가 돼서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칠까봐 지방까지 찾아가는 것이 곤란하게 돼버렸네요.
 
  1억 원이란 돈을 기부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가족들, 특히 아내에게 매번 하던 이야기가 있었어요. 내가 죽을 때 집을 팔아서라도 이 정도 금액은 학교에 기부하고 싶다는 말이었죠. 그런데 아내가 “굳이 죽어서 할 이유가 무엇이냐? 살아서도 할 수 있는 일이니 살아서 하라.”라고 권유하기에 동문회 골프대회에 참석해서 1억 원을 기부하기로 했어요. 항상 이만큼은 내가 학교에 기여할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기도 했고 마침 아내가 제게 해준 권유와 동문골프대회의 시기가 잘 맞았네요. 죽기 전에 계획했던 일을 마쳤기 때문에 뿌듯합니다.
 
  1억원이 적은 돈이 아닌데 기부하실 때 가족들의 반대는 없었나요?
 
  오히려 아내와 아들들이 격려를 아끼지 않았어요. 아내는 제가 1억 원을 기부하는 데 결정적인 조언을 했고 제가 기부하는 것에 대해 많은 칭찬을 해줬죠. 그리고 첫째 아들은 의사로 사회에서 봉사를 실천하고 있고 둘째 아들 역시 여객기 기장을 하며 사회에 공헌하고 있어요. 때문에 두 아들들도 저를 만류하지 않고 제가 기부하는데 힘을 보태줬어요.
 
  후회하신 적은 없으셨나요?
 
  숭실을 사랑해서 기쁜 마음으로 발전기금을 내는데 후회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좋은 학교를 졸업했으면 모교를 더 좋게 만드는 것이 졸업생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동문회에서 발전기금 기부를 권유하는데 졸업생들은 모두 같은 마음을 갖고 학교 발전을 위해 기부를 하고 있죠. 사실 학교 측에서 기부금을 권유했을 때 많은 동문들이 압박감을 느낄 수 있어요. 하지만 적은 돈이라도 충분히 학교 발전에 도움이 되니 부담 갖지 말고 기부에 동참했으면 좋겠어요. 
 
  동문회 활동을 활발히 하시는데 힘드시지 않으신가요?
 
  현재 총동문회 부회장으로 봉사하고 있어요. 학교발전에 도움이 된다면 건강이 나빠지기 전까지 계속해서 노력할 거예요. 저를 대신할 사람이 많아서 제게 뒷선으로 물러나라고 권유하면 어쩔 수 없지만 그 전까진 계속해서 가능한 모든 방면으로 학교를 지원할 계획이에요. 사실 제가 특별히 직접 나서서 하는 일은 없어요. 총동문회에서 기획한 일에 참관하고 협조하는 것이 주 업무죠. 제가 나이가 많으니까 후배들에게 자리를 물려주라는 얘기가 나오면 언제든 물려줄 준비도 돼 있어요.
 
  기부금이 장학금으로도 사용되는데요.
 
  저도 장학금을 받으면서 공부했어요. 당시에 우리 대학이 본래의 터전인 평양에서 재건되지 못하고 서울에서 재건됐기 때문에 장학금을 받기 힘들었죠. 다행히 교회를 통해 장학금을 받고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됐던 기억이 나네요. 돈이 부족한 후배들에게 장학금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제가 받은 만큼 후배들에게 베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강한 애교심과 학교에 대한 자부심은 어떻게 생기셨나요?
 
  평양 숭실을 졸업한 제 맏형님 덕분에 숭실에 대한 애교심이 생겼다고 할 수 있어요. 제 형님께서 한경직 목사님이 졸업한 다음 해에 최우수 성적으로 숭실을 졸업하셨고 이북에서 종교적인 신념을 지키다가 순교하셨기 때문에 저도 분단 이후에 다른 대학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어요. 서울에서 새로 문을 연 숭실은 돌로 지어진 2층짜리 건물 한 채로 개교를 했죠. 그 당시에 고려대에서 우리대학 영문과 학생들을 스카웃하려 했는데 이미 우리대학 교수님들도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를 졸업한 유능한 분들이셨기 때문에 굳이 고려대에 가서 공부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어요. 제가 앞장서서 반대했었죠. 
  또 기독교인으로서 진리를 마음에 품고 우리나라에 봉사하자는 건학정신도 마음에 들었어요. 그래서 후배들에게도 저와 같은 생각을 품고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이끌었죠. 졸업 후에도 동창회 활동을 활발히 하면서 후배 학생들에게 애교심과 자부심을 심어주려 노력했습니다.
 
  60년 전 숭실과 다른 지금의 모습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
 
  뿌듯하죠. 2층짜리 돌로 된 건물에서 시작했는데 이렇게 발전한 모습을 보면 발전기금을 더 기부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아마 다른 동문들도 똑같이 생각할거예요. 십시일반이라는 말이 있죠. 현재 숭실 졸업생들이 8만 명을 넘었어요. 졸업생들이 학교에 관심을 가지고 조금씩 기부를 한다면 그 금액이 상당하겠죠. 그렇게 되면 학교가 더 발전될 것이고 학교의 위상도 높아지게 되니 많은 동문들이 학교에 보탬이 되는 협력자가 됐으면 해요.
 
  숭실 120주년을 맞이하며 우리대학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요?
 
  학교가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되길 바라죠. 우리 대학을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 올려야 된다고 생각해요. 저는 총장님을 필두로 한 숭실 구성원들이 우리대학의 수준을 도약시킬 수 있다고 믿어요. 그래서 개인적으로도 우리대학의 수준을 높이기 위한 방법을 건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제 주장이 운영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너무 자주 건의를 드리진 않고 있습니다.
 
  숭실의 후배들을 위해 한 말씀 해주세요.
 
  학교의 수준을 높이 는데 노력해줬으면 좋겠어요. 숭실은 정말 실을 숭상하는 학교라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자신이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재학생은 열심히 공부해서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학교의 위신이 높아지면 자연스럽게 동문회의 위신이 올라가게 돼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동문들이 애교심을 가지고 학교를 돕는다면 정말 진리와 봉사를 세계로 펼칠 수 있는 숭실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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