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암벽 사이로 떨어진다. 팔은 돌덩이에 짓눌려 움직일 수 없다. 수중에 지닌 물건이라고는 500ml 물 한 통, 언제 꺼질지 모르는 캠코더, 낡은 로프, 랜턴, 그리고 중국제 칼뿐이다. 설상가상으로 가족에게조차 행선지를 알리지 않은 상태. 지도에조차 표시되어 있지 않은 고립된 공간이다.

  이 극한의 상황은 영화 <127시간>의 단출한 서사이자 127시간 동안의 고립 끝에 협곡을 탈출한 아론 랠스턴의 실화이기도 하다. 실화, 그리고 127시간의 이야기를 영상화하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한 편의 교훈적인 다큐멘터리를 연상케 하기 충분하다. 어쩔 수 없이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리얼 감동스토리와 비슷한 종류의 것들 말이다. 그러나 영화는, 한 인물이 기적적으로 살아나기까지의 영웅적 일대기를 다루지 않는다. 극한의 상황에서 인간이 보일 수밖에 없는 아주 솔직하고, 적나라한 반응들을 담아내는 데 치중한다. 영화 <127시간> 속 아론은 생명부지의 상황에서도 중국제 칼을 선물해준 엄마를 원망하고, 캠코더 속 여자들의 모습에 성적 욕망을 느낀다. 토크쇼 MC를 흉내내 보기도 하고, help를 외치기보다는 그조차도 사치임을 빠른 시간 내에 깨닫는다. 아론이 가지는 시간과 의식의 흐름은, 이처럼 눈물과 분노보다는 사실에 가깝다. 그렇기에 관객들은 아론이 갇힌 암벽에 함께 떠밀려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시간을 가늠하기 힘든 공간 속으로 서서히 동화될 뿐이다.

  또한 영화는 대니 보일 감독의 영화답게 현란한 화면 구성과 음악사용, 리드미컬한 편집으로 시선을 끈다. 아론이 처한 현재와 과거, 환상을 이리저리 넘나들며 아론이 처한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화면 구성을 보여준다. 동시에 이는 아론이 처한 고통을 철저히 타자화시키며 그가 갖고 있는 현실을 더욱 적나라하게 부각시킨다. 그러나 고통을 극복해내는 방법은 누구나 다르다. 대니 보일의 <127시간>이 새로울 수 있는 이유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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