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로 갈 때는 참으로 신기했다. 한국과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에도 이렇게 현대적인 도시가 있으리라고는 상상을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만이 아시아를 대표하는 현대성을 지녔다고 생각했던 나의 작은 자만이 낳은 결과였다. 3년 후 두 번째로 갈 때는 솔직히 무서웠다. 이 도시의 스카이라인은 처음 본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르게 변해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서울의 변화는 이곳에 비하면 그저 ‘새발의 피’였다. 순식간에 또다른 상전벽해(桑田碧海)가 일어나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세 번째로 갈때는 이곳이 아시아를 대표하는 글로벌 도시가 되었음을 인정했다. 푸동지구의 고층빌딩가만으로는 미국의 최대도시 뉴욕과 자웅(雌雄)을 겨룰 만했다. 빌딩 숲 맨 앞에서 도시의 분위기를 결정짓는 둥팡밍주타(東方明珠塔)의 다소 ‘동양적인’ 자태만이 이곳이 미국이 아닌 중국의 상하이(上海)임을 알리는 이정표가 되었다.

  상하이의 GDP는 이미 서울의 그것을 몇 년 전에 훌쩍 따돌려 버렸는데, 늘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신띠엔띠(新天地)거리의 생맥주 한 잔 값이 이태원의 맥주 가격보다 비싸다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인구 2천 3백만명에 서울보다 10배 큰 면적을 자랑하는 상하이는 사실 작은 어촌 마을이었다. 주변의항저우나 쑤저우 같은 도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낙후된 도시여서 상하이 사람들은 ‘촌놈’이라는 오명을 쓰고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편전쟁 후 영국군이 상하이에 주둔하면서부터 그 이름이 전세계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영국이 상하이에 만든 황푸꽁위엔(黃浦公園)의 입구에 나붙었던 ‘개와 중국인은 출입금지’라는 푯말이 아픈 역사의 단면을 보여준다. 앞으로 상하이가 어떤 식으로 변해갈지는 모르겠지만 이 공원의 입구에 ̒개와 돈없는 서양인은 출입금지̓라는 새로운 푯말이 생길 것 같은 어리숙한 상상을 해본다.

  이런 상상의 기저에 폭군처럼 군림했던 서양에 대한 조그만 복수심이 서렸음을 인정한다. 전통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이 뒤섞여있는 거대한 관광지로서의 상하이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걷다 보면 예전에는 없던 곳으로 진입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다시 걸으면 중국의 역사를 느낄 만한 곳으로 들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빈민가의 뒷골목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터를 틀었던 곳은 시간을내어 꼭 가보라고 말하고 싶다. 대한민국의 개국(開國)을 준비하였던 곳에서 상하이가 가진 포용력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굴욕 속에서도 긴 세월을 버텨낸 큰 도시의 인내심을 느낄 것이다. 서양이 만들어낸 오리엔탈리즘의 편견을 극복하고 싶은 사람에게 상하이를 권한다. 역사의 질곡 속에서 타의에 의해 문을열었지만 이제는 자의로 세계인에게 손짓하는 글로벌 허브 상하이를 체험할 것이다. 상하이는 ‘중국인 출입금지’라는 문구를 내리고 오래 전부터 ‘세계인 환영’이라는 거대한 관용의 플래카드를 내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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