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적인 사람이 나와서 정상적인 이야기를 한다면, 뭐 하러 소설을 읽나요?”
 
일상의 틀에 반발하고 날선 문장을 던진다. 그러나 서정적인 목소리로 말한다. 『풀밭 위의 돼지』 『숨김없이 남김없이』, 『포주 이야기』 등을 펴낸 소설가 김태용(문예창작·00) 동문이다. 그에게 문학에 대한 길을 물었다.  

 

  숭실에서는 어떤 학생이셨나요?

  저는 스물일곱 살에 대학에 왔어요. 그땐, 지금보다 훨씬 어두웠던 것 같아요. 안절부절못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많이 보수적이었어요. ‘나는 이제 끝났구나. 빨리 글 써서 등단해야겠다.’ 이런 조급한 욕심이 들었죠. 악착같이 뭐든 다 가지려고 했고, 날이 서 있는 상태라 종종 문학에 관해 선배들과 싸우기도 했어요.


  문학의 길을 택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특별한 계기는 없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했어요. 원래는 영화 쪽을 하고 싶었는데 잘 안 됐어요. 사람들과 같이 모여서 뭔가 하는 것이 스트레스가 됐던 것 같아요. 군대를 제대하고 다시 수능공부를 하면서 무엇을 할까 생각을 많이 했죠. 학교를 다시 가고 싶은 생각이 있었어요. 그래서 철학을 공부할까 하다가 문창과라는 학과를 알게 돼서 입학하게 됐어요. 입학해서는 시를 쓰려고 했는데 시는 잘 안 됐어요.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소설로 등단을 한 것 같아요.

  결정적이고 특별한 어떤 계기라기보다는 어렸을 때 혼자 방에서, 도서관에서 책을 읽던 순간들이 떠오르네요. 『토비아스』같은 책들요. 그런 책들을 읽었기 때문에 지금 비슷한 길을 걷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책들을 읽고 글 쓰고 하는 걸 좋아하니까……. ‘나도 똑같이 그런 사람이 되어야지.̓하구요.

 

  글을 잘 쓰고 싶어하는 학생들이 많아요. 글을 잘 쓸 수 있는 방법은 뭘까요?

  우리는 알게 모르게 어느 시대보다 많은 글을 쓰고 있어요. 카카오톡이나 페이스북, 블로그, 트위터 같은 SNS로 엄청나게 많은 글을 소비하고 있어요. 되게 희한한 징후죠. 친구랑 농담 한 마디를 하더라도 어떻게 더 재치있는 말을 쓸까를 고민하잖아요. 이걸 고민할 때, 안에서 어떤 작용이 일어나요. 그런 생각이 언어로 바뀌는 순간이죠. 이런 경험을 많은 인구가 동시다발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 놀라워요. 이런 글들이 의도된 문학적인 텍스트로 갈 순 없겠지만, 글을 잘 쓸 수 있는 연습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문제가 있다면 그 짧은 글쓰기에 너무 길들여져 있다는 것이죠. 글을 많이 쓰고 재치있는 언어들을 선택하는 능력은 정말 탁월하지만, 그것을 완성된 글의 형태로 바꾸기엔 정신이 이탈되었고 너무 산만해요. 어떻게 이탈된 정신을 끊을 것인지를 고민해 봐야 해요.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본인이 쓰고 있는 문장, 쓸데없이 하는 농담조의 문장들을 한 번쯤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는 거예요. 자기가 어떤 단어들을 선택하고 있고, 그것이 나에게 맞는 것인지요.

  문학은 설득하는 것이 아니에요. 설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설득당할 대상이 분명하지 않죠. 누군지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공허할 수밖에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내 생각들을 어떻게 허구화시킬 것인가, 이 생각을 좀 고착화해야 해요. 솔직하게 쓰는 것이 문학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과연 솔직하게 내 생각이 글로 표현이 될까요? 이건 말이 안 돼요. 진정성이라는 말도 이상한 것 같고. 문학이 가지고 있는 허구, 보이지 않는 형식들을 어떻게 미적인 가치로 실현시킬 수 있는지. 그런 고민들을 더 해봐야 해요.

  또 아무리 글의 의미가 좋더라도, 중요한 것은 문체예요. <롤리타>의 앞 대목을 생각해보세요. 10대 소녀를 사랑하는 너무나 뻔하고 반윤리적인 내용이에요. 하지만 <롤리타>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작가의 문체 때문이죠. 자기가 어떤 언어를 선택하고, 배열하고 있는지를 따져보는 것이 문체를 점검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요새는 문학에 대해 알고 있던 정의들과 문법적인 규칙들이 다 아닌 것 같단 생각도 부쩍 드네요.
 


  작가님의 소설에는 인물의 이름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요. 이유가 있나요?

  기존의 소설과는 다른 소설을 쓰고 싶었어요. 그래서 소설적 캐릭터가 뭘까 생각을 해봤어요. 이야기가 나오고, 인물의 이름이 나오면 그건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한 캐릭터가 돼 버리잖아요. 그래서 ‘나는 캐릭터가 없는 소설을 쓰겠다.̓라고 마음먹었죠.

  제 소설에 나오는 ‘나’, ‘당신’, ‘그녀’는 나일수도 있고, 불특정한 누구일 수도 있어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인물적 특징을 거의 없애버려요. 이름을 등장시켜도 아주 엉뚱한 이름을 집어넣는다든가 해요. 좀 힘들긴 했지만 한동안 이런 재미에 빠져 있었어요.

  예를 들어 철수가 나오는 이야기를 읽고 나서 ‘철수가 어쨌다.’하는 식으로 얘기를 하게 되잖아요. 그런 인물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감상이 퍼지는 게 원래 소설의 원형이죠. 여기서 이름이 없다면 인물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을 할 수가 없잖아요. 입 밖으로는 나오지 못하고 그냥 텍스트 안에서만 살아있는 존재로 남아 있으니까요.

  지금은 그런 엉뚱한 이름, 인칭마저 소거시킬 수는 없을까 하는 고민을 해요. 심지어 공간과 이야기처럼 소설에 있어야 할 중요한 요소까지 제거해도 소설은 되지 않을까요? 이러면서 다시금 소설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게 됐죠.

 

  소설집 『풀밭위의 돼지』에 나오는 단편인 <검은 태양 아래>에 보면, 주인공이 친구의 결혼식 사회를 엉망으로 봐서 쫓겨나는 장면이 있어요. 만일 작가님이 가까운 지인 결혼식의 사회를 보시게 된다면 해주고픈 말씀이 있나요?

  일단 제게 결혼식 사회는 아무도 부탁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결혼식 사회는 아니구요. 작가들 낭독회 사회를 한 번 봤었어요. 외국 작가들도 함께 하는 자리였는데요. 그 소설가들끼리 최근에 결혼을 했어요. 그래서 “한국에선 소설가끼리 결혼하면, 여자 소설가는 글이 더 좋아지고 남자 소설가는 더 안 좋아진다.” 이런 얘기도 하고, “2세는 언제 낳을 계획인가요?”라는 질문을 했는데요. 외국 작가들이 너무 놀라는 거예요. 외국에선 그 물음이 아주 친한 사이가 아닌 이상은 상당히 불쾌하고 금기시되는 거래요. 해명을 해서 풀어지긴 했는데, 그런 문화적인 차이도 느꼈고요. ‘아 나의 삐딱함이 여기서도 등장을 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켈켈켈켈.

  사람의 특징을 담아내고 싶은 욕망은 좀 있어요. <검은 태양 아래>를 쓸 당시에도 결혼식을 되게 많이 갔어요. 그때 들었던 정해진 멘트, 공식적인 멘트들에 대한 환멸이 있었어요.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될까?하는 엉뚱함? 정해진 규칙을 위반하고 싶은 욕망이 있죠. 하지만 현실 안에서는 할 수가 없어요. 에둘러서 이야기를 하는 게 전부겠죠. 뭐 현실에서 할 수가 있다면 굳이 소설에 쓸 필요는 없었겠지만요.

 

  문창과가 통폐합되는 등, 사회적으로 좋은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어요. 문창과를 나오셨고, 현재 문창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시는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사실 이건 한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경제적인 가치로 학문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완전히 말이 안 되는 거예요. 문학은 돈으로 바꿀 수 없는 고유한 가치가 있죠. 쓸모없어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쓸모없기 때문에 중요한 거예요. 그런데 그 쓸모없음을 자꾸 쓸모있게끔 돈으로 환원을 시켜서 대중적인 영향력을 가진 시스템으로 만들려고 해요.

  다른 학과와 통합하는 것도 더 좋은 시너지를 낼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문제는 통합하는 것 자체부터 있어요. 문학이 거기에 먹힐 소산이 너무나 많아요. 지금은 영상적인 것이나 핸드폰 같은 매체들에 우리가 즐기고 있는 문학적인 것들이 먹혀 있는 경우가 많아요.. 왜냐하면 문학은 지루한 장르잖아요. 문학이 재미있었던 시대는 이제 많이 지나갔고요. 그걸 향유했던 대중들도 다 다른 곳으로 옮겨갔지요. 저만 해도 소설을 읽을 때보단 영화 볼 때 더 큰 쾌감을 느끼거든요. 솔직히 부정할 수 없죠. 이것을 완전히 부정한다고 해서 부정되지도 않을 거구요. 하지만 이건 있되, 소설이나 시가 가진 고유한 가치에 누군가 테두리를 쳐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문학을 하려면 마음을 굳게 먹는 수밖엔 없어요. 정신적으로 무장을 해야 해요. 이제 문학을 시작하는 친구들은 예전보다 더 여건이 좋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다른 매체에 대한 유혹에 쉽게 빠져들 수 있어요. 그러니까 본인이 이걸 순수하게 고집하겠다는 아집, 편견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런 힘들이 모인다면, 버틸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문학은 규모가 작아질 뿐이지 사라지진 않는 거잖아요. 이런 면에서 다른 식으로 긍정적인 에너지를 얻어야죠.

  "문학을 하는 애들이 소수가 된단 말이지
  오히려 좋은 효과가 날 수도 있어
  갈 애들은 가라
  난 처절하게 빛을 발하겠다."

   

  이 인터뷰를 한 문장으로 정의한다면요?

  다시 첫 문장으로 돌아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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