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퍼 김성훈(영문·02) 동문

  

   치열한 힙합세계에서 오로지 실력으로 승부하고자 하는 진정한 래퍼 술제이, 거친 랩을 하면서도 그 안에 문학적 감성을 담을 줄 아는 그는 랩과 음악, 예술을 사랑한다. 언제나 살아남는 MC로 기억되기를 소망하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힙합은 언제, 어떤 계기로 시작하게 됐나요?
 
  힙합이라는 장르 자체를 잘 몰랐어요. 정확한 나이는 기억이 안나는데 서태지의 <난 알아요>라는 노래를 TV에서 처음 듣고 ̒와 이런 음악도 있구나.̓라고 생각했어요. 그때부터 랩 음악들을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들었죠. 학교에서 소풍을 갈 때면 사람들 앞에서 장기자랑으로 랩을 하기도 하고요. 그러다가 2002년도에 숭실대에 입학하고 흑인 음악 동아리 Da P.I.S에 들어가게 됐어요. 그때부터 랩을 쓰며 본격적으로 음악이라는 것을 시작하게 됐죠. 
 
  Da P.I.S에서 활동하며 기억에 남는 일화나 공연이 있을까요?
 
첫 오디션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저는 정말 랩을 잘하는 줄 알았거든요. 동네 노래방에서 부를 때도 친구들이 좋아했고, 경남지방에서는 제가 최고인 줄 알았어요. 동아리 가입신청서를 내고 처음으로 쓴 가사를 발표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잘한다. 사람들이 놀랄 것이다. 왜 이제야 왔냐고 할 것이다.̓라고 생각했죠. 근데 오디션에서 3분 정도의 랩을 하는데 박자가 하나도 안 맞는 거예요. 제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선배들이 “진짜로 못한다.”하며 놀랐죠. 저는 그때 현실을 깨달았어요. ̒노래방에서 하던 것이 다가 아니구나. 가사를 쓴다는 것은 다른 것이구나.̓라고 생각했어요. 
  그 이후 동아리에서 활동하며 몰랐던 노래들도 많이 알아가고 악착같이 가사를 썼던 것 같아요. 많은 무대도 가졌었죠. 첫 무대도 기억에 남는데 그때도 박자를 못 맞췄어요. 옆에 함께하던 형이 제 등을 치면서 박자를 맞춰줬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영문과 전공에 문예창작학과 복수전공을 했다고 들었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성적에 맞춰서 지원서를 썼어요. 근데 영어영문학과의 문학적인 부분들이 저와 잘 맞았던 것 같아요. ̒라임을 맞춰 랩을 하려면 영어 공부를 해야 한다.̓라는 생각도 조금은 있었구요. 특히 문학에 관심이 많아서 문창과를 복수전공하며 글공부를 재미있게 했어요. 전과까지 생각할 정도로요. 그때가 제 문체들이 잡히고 표현력들이 살아났던 시기인 것 같아요. 랩이라는 것은 글을 쓰는 것이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문학이거든요. 그때 배웠던 것들이 지금 제가 랩을 쓰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죠. 
  또 제게는 소설가라는 또 다른 꿈이 있습니다. 소설창작수업을 들으며 단편소설을 내기도 했었고요. 지금은 랩만으로도 버겁지만 언젠가는 꼭 소설가가 됐으면 좋겠어요. 
 
  2005년 엠넷 밀러 그루브 데이 랩 배틀 대회 예선 4강전에서 드래곤에이티에게 첫 패배를 했습니다. 패배의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자만과 미숙함이 원인이었던 것 같아요. 랩배틀이나 프리스타일을 즐겁게 한 적은 있었지만 래퍼인생과 제 이름을 걸고 뛰어들었던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배틀에 대한 인식이 없었죠. 8강전까지만 해도 ‘우승하겠는데?̓이렇게 생각했어요. 근데 예선 4강전에서 드래곤에이티를 만났죠. 그 친구는 자신의 인생을 걸었더라고요. 삶도 거칠고 빠듯하지만 열심히 살고 있는 친구라는 것이 그 짧은 순간에도 느껴졌어요. 저는 그런 것이 없었던 것 같아요. 처음으로 배틀에서 지고 3일 동안 ̒이제 랩을 못하는 건가. 꿈을 접어야 되나.̓라는 생각이 들어 심적으로 무척 힘들었어요. 근데 다시 한 번 일어났어요. ̒그동안 정말 바보처럼 살았구나.̓ 반성하고 하루에 6시간에서 9시간 정도를 매일 랩 연습만 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연습했기 때문에 그 다음 라운드에서 상대를 이길 수 있었고 우승까지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프리스타일 랩을 고집하는 이유는 뭐예요?
 
 
  엠넷 밀러 그루브 데이 랩배틀 대회가 가장 큰 자극이었던 것 같아요. 우승 후 우승상품으로 미국에 가게 됐는데 정말 좋은 경험을 했어요. 미국은 프리스타일 장르 자체가 하나의 놀이인 것 같아요. 우리는 어릴 적에 구슬치기, 딱지치기를 하잖아요. 근데 힙합이 태어난 미국에서는 그런 놀이 중에 하나가 프리스타일이고 랩이에요. 미국 친구들은 17살만 돼도 랩을 한 지 10년이 돼요. 그러니까 그쪽에서는 랩을 듣는 귀가 다르고 수준이 다르죠. 우리나라 프리스타일 문화도 미국처럼 보급된다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또 서울 말고 다른 지방에서도 그런 문화가 생길 수 있도록 불씨를 지펴보고 싶어요.2년 가까이 전국을 돌며 무료 프리스타일 세미나와 행사들을 진행하고 계십니다. 그 시작으로 랩배틀 방송 <박서>가 있었죠? 제가 소속사인 프리스타일 타운을 통해 다양한 문화들을 컨텐츠로 제작해서 사람들에게 좀 더 쉽고 재미있게 알려주고 싶었어요. 그러던 중 프리스타일 랩배틀에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미국에서도 많이 열리고 우리나라 홍대 클럽에서도 많이 하더라고요. 특히 랩배틀을 무반주로 하는 대회를 보고 “재밌다. 우리도 한번 해보자.” 해서 시작하게 됐어요. 현재는 랩배틀, 비트박스 배틀, 댄스 배틀까지 영역을 넓혔고 공연과 함께 배틀을 하는 <박서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공격적인 프리스타일 랩과는 달리 데뷔 앨범 「미친 사랑의 추억」은 감성적인 앨범인데요, 이유가 있을까요?
 
  그 전에 이미 피처링으로 <Pride>라는 노래처럼 강한 트랙들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공식적으로 제 이름을 걸고 나온 것이 「미친 사랑의 추억」이에요. 애절하고 슬픈 것도 제 감성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저런 음악을 하던 와중에 첫 싱글이 그렇게 된 것 같아요. 데뷔앨범 말고도 <불도저> 프리스타일 버전, <뭐라꼬> 등 저는 다양한 시도들을 했고 대중들은 그런 제 노래들 중에서 감성적이고 대중적인 노래를 더 좋아해주시는 것 같아요. 거칠거나 강한 음악들은 제가 좋아해서 하고 싶고, 멋있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좋아하는 노래들을 할 때가 더 즐거워요. 피드백이 많고 좋아해 주시니 그런 부분에서 보람을 느낍니다. 
 
  이번 해에 발매한 <뭐라꼬>가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뭐라꼬>에서 특별히 사투리를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뭐라꼬>는 김보선씨의 <뭐라고>에서 코러스를 가져온 노래예요. 김보선씨와 다른 곡을 작업하던 중 서로의 곡과 가사를 공유하다가 <뭐라고>를 처음 듣게 됐어요. 사투리 노래가 아니었는데 제가 듣기에는 딱 사투리로 들리더라고요. 그래서 ̒이거 사투리로 만들면 재미있겠다.̓라고 생각했죠. 바로 다음날 1절을 만들었어요. 그렇게 시작된 노래가 <뭐라꼬>입니다. 
  그리고 제 고향이 거제도예요. 살아온 곳도 창원, 마산, 경상도권이구요. 사실 숭실대에 입학하면서 서울에 처음 왔습니다. 랩이라는 장르가 자신의 인생을 담아내고 평소에 쓰던 말투가 자연스럽게 담기는 음악이잖아요. 그래서 사투리를 억지로 고치려 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썼던 것 같아요.
 
  요즘 힙합에 대한 관심이 뜨겁습니다. 힙합을 하는 사람으로서 어떤가요? 
 
  우선 힙합을 하는 사람으로서 기분이 좋죠. 근데 이런 흐름이 계속되면 세대가 바뀌고 자본이 
유입되며 본질이 변질되거나, 다양한 기류들이 형성될 수 있어요. 이때 돈만을 추구한다거나 멋있으니까 뛰어드는 사람들보다는 멀리 보고 살아남으려는 사람들이 더 많아져서 힙합 세계의 기둥이 좀 더 단단해졌으면 좋겠어요.
 
  힙합을 시작하려는 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을까요?
 
  매체에서 보도할 때 힙합의 과격한 부분이나 디스 같은 자극적인 부분들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어요. 근데 힙합과 랩이라는 것은 자기 인생을 담아내는 글짓기이자 음악입니다. 그래서 시작
하시는 분들도 먼저 문학적으로 소양을 쌓으셨으면 좋겠어요. 그런 소양들이 랩에서도 자연스럽게 묻어나도록 말이에요. 음악을 많이 듣고 독서를 많이 하시면 분명 도움이 될 것입니다. 
 
  30대로서 20대 청춘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요?
 
  저는 스무살 때 한 살 많은 선배만 봐도 어려워했어요. 세 살이나 네 살 많은 선배들을 볼 때면 ̒내가 저 나이가 될까?̓라는 생각을 할 만큼 차이가 많이 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벌써 서른 두 살이 됐죠. 제 생각에 인생이라는 것은 10년 단위로 일궈서 그 다음 10년, 그리고 그 다음 인생을 준비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20대 때 뭣도 모르고 악착같이 했던 랩을 갖고 현재를 살아가고 있어요. 이렇게 랩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크게 소리치고 싶은 만큼 행복하고요. 저는 40대도 빨리 올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국어 공부 등 자기계발을 하면서 다음 10년 후를 계획하고 있어요. 여러분들도 10년이 지나면 30대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멀리 보고, 계속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쫓으면 즐거운 인생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잘 준비하셔서 꼭 멋있게 인생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시간 금방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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