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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남아 여행을 하다 보면 우리나라의 위대성을 실감하게 된다. 전 국토를 실핏줄같이 연결한 고속도로가 왜 그렇게 그리워지는지 모르겠다. 30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버스나 택시를 타고 몇 시간 달리다 보면 허리에서 시작된 통증은 머리로 전이되어 두통을 일으킨다. 비포장도로의 덜컹거림으로 창문은 저절로 조금씩 틈을 만들며 열려버리고 그 열린 틈으로 흙먼지가 들어온다. 손으로 입을 막아도 보고 안경의 렌즈 위에 수북이 쌓여가는 먼지를 조심스럽게 닦아내 보기도 한다. 그나마 내가 탄 탈 것에는 에어컨이 있다는 사실을 감사해야 하는 상황이다.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인내력은 다음 도시에서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지에 대한 호기심에서 나올뿐이다.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을 거쳐 두시간 반을 밑으로 쭉 내려와서 후추로 유명하다는 깜뽓(Kampot)에 도착했다. 이 도시에서 생산되는 후추는 유럽의 고급 레스토랑에서만 쓰인다고 하는데 정작 후추냄새는 어디에서도 나지 않는다. 아마도 분명히 후추 냄새가 났을 법도 한데 차 안에서 마구 흔들려 버린 나의 뇌가 후각을 담당하는 세포를 활성화시키지 못했던 것 같다. 냄새를 못 맡을 정도로 흔들린 뇌가 그나마
인지한 것은 이 도시는 참으로 평온하고 모든 것이 느긋하다는 것이다. 거리의 아이들마저 정말 ‘느긋하게’ 뛰어 논다. 적도를 관통하는 태양마저 느긋하게 자외선을 쏴댄다. 태양도 이 도시에서는 잠시 그 움직임의 속도를 늦추는 듯하다. 가공된 향신료로서의 후추가 아닌 나무 열매로서의 후추 또한 강렬한 햇빛의 저편 어딘가 숨어 은은한 향기를 발산하고 있는 것일까.

  영화배우 감우성 주연의 <알포인트>라는 영화는 한국군의 베트남전쟁 참전 중 일어난 괴기스러운 일을 소재로한 영화인데 그 실제 촬영지는 아이러니하게도 베트남이 아니라 이곳 깜뽓이다.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은 더위를 피해 깜뽓을 둘러싸고 있는 보꼬(Bokor)산 위에 그들만의 휴양지와 카지노를 건설했는데,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 식민지시대의 ‘불쾌한’ 유산에서 영화가 촬영되며, 수많은 관광객이 이곳에 몰려든다고 하니 시간의 흐름이란 좋고 나쁜 모든 것을 먹어버리는 블랙홀과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캄보디아에서 벌어진 킬링필드의 공포와 비극마저 시간이라는 이름의 블랙홀에 모두 빨려 들어가 버린 것만 같다.

  깜뽓은 워낙 작아서 하루 동안 주변관광지를 포함해서 구석구석 다 볼 수 있지만 하루로는 그 묘미를 느낄 수 없는 도시다. 메콩 강의 지류 위를 천천히 유영(遊泳)하는 배 위에서 석양을 바라보고 강 주변을 밝히는 ‘깜뽓스타일’의 카페를 고양이 하품처럼 즐겨야 제맛이다. 때묻지 않은 휴양지를 찾고자 하는 사람에게 이 도시를 추천한다. 도시로 들어오고 나가는 길의 불편함을 뒤로 하고 진정한 고진감래(苦盡甘來)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좋다. 지금 생각하니 밤을 밝히는 달마저 평소보다 그 움직임이 느긋했다. 은은한 후추 향기는 달빛과 함께 천천히 내 후각을 자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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