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를 풍미했던 야세르 아라파트(Yaser Arafat:1929~2004)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 의장은 카이로 대학교 출신이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태어났지만 카이로에 묻히기를 원했다. 이스라엘에서 시나이 반도를 거쳐 카이로에 도착한 내가 가장 먼저 간 곳은 피라미드도 이집트 고고학 박물관도 아니었다. 젊은 아랍 청년이 게릴라 조직을 만들고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을 위한 투쟁 계획을 수립했던 곳으로서의 카이로 대학교를 보고 싶었다. 무엇이 부유한 상인의 아들이었던 그를 테러리스트의 수장으로 만들어 버렸는가를 생각했다. 마치 부러울 것 없는 성주(城主)의 아들이었던 싯다르타가 석가모니로 재탄생하는 것과 같은 환골탈태의 현장인 이 학교의 캠퍼스를 꽤 오랜 시간 거닐었다. 내가 스스로 중요하다고 의미를 부여한 곳에 가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여행의 시작임을 깨달으면서 이 도시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투탕카멘의 가면을 보는 것보다 열렬한 투쟁가의 발자취를 느끼는 것이 더 먼저임을 인식했다. 튀니지에서 시작된 ‘재스민 혁명’은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으로 옮겨 붙어 활활 타오르며 독재자를 몰락시켰는데 이 모습을 이미 고인(故人)이 된 투쟁가 아라파트는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해진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크고 오래되었다는 도시 카이로의 아랍식 이름은 ‘알카히라’인데, 이곳에서 언뜻 떠오르는 ‘검은 아프리카’의 이미지는 그 어디에도 없다. 아프리카는 검어야 한다는 나의 고정관념은 이집트를 한 때 최강국으로 번영할 수 있게 해준 나일강을 봄으로써 환영(幻影)처럼 사람진다. 좁은 나일강의 강폭은 너무 큰 기대를 하고 와서인지 현지인들에게 여기가 나일강이 맞느냐고 몇 번씩 물어보게 만든다. 진짜 나일강은 어딘가에 엄청난 크기의 감동을 주며 내 눈 앞에 장대하게 나타날 것 같은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큰 기대는 동시에 큰 실망을 가져다준다는 것은 이 시점에서는 진리다.

  이제는 이집트의 담배 이름으로 존재하는 ‘클레오파트라’와 신과 동격이었던 파라오 시대의 영예는 모두 박물관으로 들어가 버리고, 이 도시에서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크고 작은 이슬람 사원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카이로는 자체적으로 교황을 가지고 있는 콥트(Copt)기독교의 본산이다. 이집트 인구 열 명중 한 명은 콥트교 신자라는 사실만으로도 나의 짧은 지식은 겸손함의 그늘 밑에 숨는다. 학창시절 사전을 보며 의아해했던 ‘Egyptology’의 의미는 단순히 지역학으로서의 ‘이집트학’이 아님을 체감한다. 뒤편에서 서민들이 가장 즐겨먹는 음식이라는 ‘코샤리’를 주문하는 사람들의 외침과 굉장한 속도로 달려오는 자동차 앞을 “Walk like Egyptians(이집트 사람처럼 걸어.)”라고 말하며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걸어 나가는 현지인들의 모습에선 만감이 교차한다.

  태양과 물이 빚은 고대문명의 태동과 번영, 신보다 강력했던 통치자의 권력, 투쟁과 혁명의 뜨거움을 모두 맛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카이로를 권한다. 짧은 시간을 살다간 인간들이 만든 장고한 문명의 깊이 속에서 짧지만 깊은 멈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잠시 멈추는 것은 나를 되돌아보기 위함이며 행복이다.

고대문명의 영예와 현대사의 굴곡을 모두 목도한 나일강은 여전히 유유히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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