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부 색깔은 분명 검은데 파란 눈을 가진 여인이 거리를 활보한다. 검은피부 속에 박힌 파란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면 어떤 색으로 보일까. 난 늘 색다른 것을 볼 때마다 이런 어리석은 상상 속으로 빠져드는습성이 있다. 머리카락은 금발인데 얼굴은 왠지 동양적인 미인이 카페에 앉아 망중한 (忙中閑)을 즐기는모습도 보인다. 그들의 뇌쇄(惱殺)적인 미소가 삼바 리듬을 타고 나를 매혹시킨다. 어디서든손만 뻗으면라틴 댄스를 함께 즐길파트너가 될 것 같은 은은하고 너그러운 표정들. 하나의 몸에서 저렇게 다른 색깔과 분위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니. 이 도시를 구성하는 사람들 자체가 ‘다문화성(多文化性)’을 설명한다. 남자들은 모두 브라질 무술인 ‘주짓수’의 달인인 것처럼 길쭉길쭉한 근육질의 팔다리를 날렵하게 휘저으며걷는다. 하나같이 같은 듯하지만 다르다. 우리나라 사람들만큼이나 패션에 신경을 쓰는 듯 모두들 잘 차려입고 있다. 말로만 듣던 패션 도시 상파울루에 상(相)이 찌푸려질 정도의 긴 비행을 마치고 도착했다.
   남미대륙에서 가장 큰 도시 상파울루는 인종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는 ‘인종분류법’을 무용지물로 만든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각기 다른 형형색색(形形色色)이 되고, 새로운 인종으로 탄생한다. 백인 부모 사이에서 흑인 아이가 태어나고 흑인 부모 사이에서 백인 아이가 태어나는 것은 브라질에서는 큰 뉴스거리가 아니다. 브라질친구의 말이 나에게 신선하게 들린다. “워낙 오랫동안 마구 섞여버린 유전자 때문에 브라질에서는 ‘인종차별’이란 말은 존재하지 않아.” 인구가 천이백만 명에 달하는 초거대도시 상파울루의 다양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 도시가 나에게 보라고 손짓한 것은 박물관이나 카톨릭 성당 같은 건물이 아니라 ‘다르지만 공존한다’ 는 ‘다름의 미학’ 이었다.

  스페인어와 비슷하다고 여겼던 포르투갈어를 직접 들으니 프랑스어와 더 비슷하게 들리는 것은 나만의 느낌인지, 아니면 브라질 사람들 특유의 악센트와 억양이 합쳐져서 그런 것인지 혼란에 빠진다. 중요한 것은 상파울루에서는 영어만으로 살아갈수 없다는 것이다. 미국 당국이 공항에서 외국인에게 지문 날인을 요구하자 미국인이 브라질로 입국할 때 똑같이 지문날인을 요구한 브라질의 ‘당당한 호혜주의’는 자존심을 넘어 우월감으로까지 보인다. 미국을 상대로 ‘이에는 이, 눈에는 눈’ 대응을 할 수 있는 나라 가 이 지구상에 과연 얼마나 될까.
   이질적인 것과 함께 산다는 것이 힘들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상파울루 여행을 권한다. 그리고 브라질의 대표적인 서민음식 페이조아다(Feijoada)를 꼭 먹어 볼 것을 권한다. 야채와 콩, 각기 다른 고기가 잘 어우러진 이 음식을 맛보며 다양하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에너지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다양함이라는 에너지는 단일함이라는 순수성을 무너뜨리는 무기가 아닌, 혁신의 아버지와 변화의 어머니가 됨을 알게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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