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 (일어일본·12) 문학박사

  지난달 13일(금), 75세의 할머니가 본교 일어일본학과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 연세에 어떻게 박사학위에 도전할 생각을 했느냐는 물음에 그녀는 “공부를 해도 나이 먹고 공부를 안해도 나이 먹는
다. 그렇다면 공부를 하면서 나이를 먹는게 어떠냐?”고 되묻는다. 배우는 것이 한창 즐거울 나이라는 75세 김정희 박사, 도전하는 것에 있어 그녀에게 늦은 나이는 없었다.

  75세에 문학박사 학위를 받으셨어요.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 70세가 넘는 나이에 어떻게 대학원에 진학할 생각을 하셨나요?
  지난 2012년에 본교 대학원에서 일어일본학과 박사과정이 개설됐어. 그리고 그 해 2월에 내 지도교수 이시준 교수님을 우연히 봤지. 그 교수님이 나한테 박사과정에 도전해보라는 거야. 처음엔 농담인줄 알았지. 나는 그때 칠십이 넘었었고 겸임교수도 은퇴도 했으니까. 그런데 9월에도 이 교수님이 “왜 등록을 안했냐?”고 묻더라고. 그래서 “무슨 소리냐. 농담으로 알았다. 칠십에 누가 박사를 하겠냐.” 이랬더니 “농담이 아니다. 하셔라.” 하면서 서류를 내라고 강력히 추천해줬어. 그제서야 이화여자대학교에 가서 졸업증명서 떼고 상명대학교에 가서 졸업증명서 떼고, 가까스로 준비를 했지. 그렇게 도전이 시작된거야.

  70세가 넘어서 대학원에 다니시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사실 이전에 니가타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할 당시 학점을 다 받았거든? 그런데 본교 일어일본학과 박사과정은 처음 개설되는 거니까 36학점을 이수해야 한다는 거야. 내가 72살에 고생을 산거지. 그렇게 들어갔는데 숭실대에서 겸임교수로서 가르친 애들이 조교고, 함께 공부하게 됐어. 그러다보니 다들 내가 들어오니까 깜짝 놀란 눈치야. 그런데 걔네들은 고전을 공부했고 나는 근대 문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고전 문학을 배우는 데 내가 좀 뒤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어. 같이 배우는데 좀 창피하더라고. ‘이걸 꼭 해야 하나? 제자들하고 뭐하는 건가.. 그만두자.’ 하고 집에 온 적이 많았어. 이제 안한다고. 그걸 몇 번을 했는지 몰라. 그런데 그렇게 다짐한 다음날이면 또 책을 싸고 다시 학교에 가더라고. ‘아 이건 참 운명이다’ 생각했지. 그때부턴 ‘그럼 하자!’라는 마음을 먹고 오로지 공부하고 논문에 집중했어. 그래서 2년 반 만에 박사학위를 받았는지도 모르겠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문학에 나타난 소재활용 방법 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으셨어요. 박사님께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뭔가요?

  이 사람은 동경대학교 영문과를 2등으로 졸업한 수재야. 근대사 지식인들의 고민을 대변하는 천재지. 그런데 그런 인물이 35세에 자살을 했어. ‘왜 자살을 했을까?’ 궁금하더라고. 그래서 그를 연구하기 시작했지. 연구해보니까 아쿠타가와는 굉장히 냉소적이며 회의적이고 아주 우울한 작가였어. 그러다보니 또 그의 작품과 일생이 궁금해지더라고. 그의 작품에는 그 시대의 사회가 투영돼있어. 소설을 통해 사회를 비판하는거지. 조선의 김응서 장군의 전설을 각색한 ‘김장군’에서는 일본의 역사인식이 자국중심주의적이라는 점을 꼬집기도 했어. 이런 점에서 한 번 연구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어.

  이화여대에서는 불문과를 졸업하셨는데 상명대 대학원에서는 일문과에 입학하셨어요. 일본어를
선택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불문과를 전공할 땐 불란서 유학을 꿈꾸기도 했지. 그런데 1970년에 남편이 일본 주재 신문사 특파원으로 일하게 되서 일본에 가 살게 됐어. 그렇게 1년 반을 일본에서 살면서 일본어를 배우게 됐지. 그걸 시작으로 상명대 대학원에 입학하면서부터는 일본어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어. 불란서는 한국에서 멀어서 쉽게 왔다갔다를 못하잖아. 그런데 일본은 한국에서 가까우니까 부담이 덜했지. 일본에서 1년 반 산 것이 결정적이었던 것 같아. 인생 참 신기하지? 어쩌다 시작한 일본어 공부로 박사학위까지 받게 됐잖아. 매순간의 선택이 인생을 바꿀 수도 있는 것 같아.

  공부를 하시면서도 가정에서는 아내와 엄마로 지내셔야 했는데,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보통 여자가 밖에 나가서 공부를 하면 가정에 충실하지는 못한다고 하지.. 실제로 나도 일해주는 아주머니한테 대부분의 집안일을 맡겼거든. 막내가 대학교를 다닐 땐 같이 일본어를 공부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아이들한테는 늘 미안한 마음이야. 우리집 양반도 탐탁지 않아 했었고. 그런데 외국대학에서 합격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잖아? 그래서 합격했으니 일단 들어갔지. 박사학위를 꼭 받아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도전이니까 열심히 했어. 그렇게 한 4년쯤 다녔을 땐 논문이 4편이 됐어. 그래서 ‘박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겠다’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하필 그때 우리집 양반이 병이 났어. 한국에서 한 달간 병간호만 하게 됐지. 박사학위 구술시험을 보려면 이를 위해 내 논문을 다 봐야하는데 말이야. 그래서 구술시험에서 아무 대답도 못했어. 결국 떨어졌지. 그때는 너무 속상해서 외국인 등록증을 현관 앞에 던지기도 했어.

  1999년에는 한·일 문화교류 정책 자문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하셨는데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당시 국민의 정부 때는 한·일 문화교류가 잘 안됐었어. 그래서 ‘일본 문화를 들여오느냐 마느냐’를 주제로 토론을 많이 했지. 당시 많은 남자 교수들은 일본 문화가 들어오면 큰일난다고 했어. 일본드라마가 폭력성이 강한데 그게 들어오면 우리가 따라한다고.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일본문화를 들여오느냐’는 의식도 강했지. 그런데 나는 그때 일본문화를 개방해야한다고 하면서 “일본 문화가 들어와도 우리는 민족성이 강하기 때문에 휩쓸리지 않는다. 빨리 개방해야한다.”고 주장했어. 1년 간의 긴 토론 끝에 결국 개방이 됐지. 그 후로 일본드라마부터 영화까지 들어오고 있어.

  일생에 거쳐 배움의 길을 걸어오셨어요. 계속해서 배움에 도전하시는 이유는 뭔가요?
  어렸을 때부터 책 읽는 것에 관심이 많았어. 지금도 집에서도 가만히 있기보다는 항상 책을 읽어. 지금 보면 학문에 취미가 있었던 것 같아. 학문에 취미가 없었으면 못했겠지. 연구와 발표를 하고 내 논문을 누군가가 인용하고 응용하는 것에 성취를 느껴. 인생에서 제일 행복했을 때가 지난 2008년에 중국에서 수많은 외국인들 앞에 나가 한국에서 가져온 논문을 가지고 발표를 했을 때였어. 가족들은 논문이나 연
구에 매달리는 나를 안타깝게 보지만 나는 배울 때가 가장 즐거워.

  50세에 유학, 72세에 대학원 입학 등 쉽지 않은 일임에도 늘 결단력 있는 판단을 하시는 것 같아
요. 그 결단력의 원천은 뭘까요?
  인생에는 딱 두 길이 있더라고. ‘할까 말까.’ 나는 인생에 기회가 온다면 뭐든 구애받지 않고 잡았던 것 같아. 인생은 긴 마라톤이야. 그 마라톤을 ‘시작할까, 중단할까.’ 계속 갈등하게 되지. 그런데 나는 항상 긍정적인 선택을 했어. 여러 사람에게 기회가 주어지진 않잖아? 그 자격과 조건을 갖춘 사람만이 기회를 잡을 수 있지. 난 그 기회를 잡기위해 끊임없이 공부했던 것 같아. 건강, 하고자 하는 의지, 그리고 노력이 내 결단력의 원천이야.

  요즘 젊은이들은 꿈을 꾸기 전에 지레 먼저 겁을 먹는 학생들이 많아요. 그 친구들에게 한마디만 해주시겠어요?
  항상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곁눈을 팔지 말고 매진하라고 말하고 싶어. 요즘 젊은이들은 하나의 일을 끈질기게 못하는 것 같아. 그런 형편도 안되는 것 같고. 그런 사회를 물려준 기성세대로서 미안하기도 하고 많이 안타까워. 그런데 니카타 유학 때, 오로지 공부를 위해 오십이 다 된 할머니가 연구실 구석에서 잠을 잤어. 배우는 것이 마냥 즐거웠기 때문에 일주일에 몇번씩 한국과 일본을 넘나들었지. 젊은이들도 포기만 하지 않는다면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해. 할머니의 꿈이 이뤄진 것처럼 젊은이들의 꿈도 이뤄지길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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