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월 11일 이후에 발행된 미국 여행 가이드북에는 이 도시에서 110층 높이를 자랑하던 세계무역센터(World Trade Center) 빌딩이 없다. 속칭 ‘9.11 테러’라고 불리는 참극(慘劇)의 발생으로 이 마천루는 붕괴되어 수 많은 희생자와 함께 사라졌으며, 다음에 뉴욕을 다시 방문하면 이 빌딩의 107층에 위치한 전망대에 오르려고 했던 나의 생각 또한 사라졌다. 영원히 존재할 것 같았던 것이 순식간에 없어지는 것을 목도한 후부터, 난 여행 중에 아무리 피곤해도 가볼 곳은 다음으로 미루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동경(憧憬)의 대상이 붕괴되는 참혹한 모습은 나에게 작은 트라우마를 남긴 듯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 마음 속의 로망이었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사라지지 않은 것이었다.

  1931년에 완공된 후, 1972년까지 무려 41년 동안이나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로 이름을 날렸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 가보는 것은 내 어릴적 꿈 중의 하나였다. 영어로 ‘Empire’가 무슨 뜻인지도 몰랐던 나이였지만 이 근사하고 웅장한 빌딩에 오르면 황제가 된 것 같은 기분에 빠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 때는 이 빌딩이 있는 도시보다는 이 빌딩 자체에 더 큰 매력을 느꼈다. 마치 독일의 뮌헨을 가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뮌헨에서 열리는 맥주축제에 더 많은 관심이 있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볼 것이 너무 많아 시간만 허락된다면 두 달 정도 도시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니고 싶은 도시 뉴욕에 왔다. 미국의 여러 도시를 다녀봤지만 뉴욕을 처음 방문한 것이 1999년말 이었으니 조금만 늦었어도 ‘슬픈 일을 경험한’ 뉴욕에 갔었다고 나는 기록했을 것이다.

1972년까지 41년간 세계최고 높이를 자 랑했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미국의 상징 자유의 여신상, 마천루 숲 속의 에덴동산 센트럴 파크, 현란한 옥외광고의 모든 것 타임스스퀘어, 프로 스포츠의 메카 매디슨 스퀘어 가든, 억만장자의 아름다운 꿈 록펠러 센터, 시민들의 기부금으로 탄생한 예술혼 링컨 센터, 세계 금융의 중심 월 스트리트, 미국 예술의 진앙지 뉴욕현대미술관(MoMA)과 구겐하임 미술관(Guggenheim Museum). 일일이 모든 장소에 간단한 설명을 붙여 열거하는 것조차 힘든 이 도시의 하드웨어 콘텐츠들은 언제나 ‘세계 최고, 세계 최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그러나 더중요한 것은 이 도시에 흐르는 자유에 대한 열망과 지성(知性)이라는 이름의 소프트웨어 콘텐츠일 것이다. 현대성(Modernity)의 의미를 잘 구현해내고 있는 도시 뉴욕을 도시의 도시라고 명명(命名)해본다.

  비자가 면제되어 예전보다 가기 편해진 미국의 뉴욕이지만 쉽게 가려고 하지 않는 이유는 이 도시는 천천히 음미하고 체험하며 즐기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는 마음 때문이다. 지난번의 경험을 비추어볼 때, 주마간산(走馬看山)격으로 보면 왠지 껍데기만 보고 안에 있는 내용을 놓친 느낌이 올 것 같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국 여행을 계획한 사람에게 뉴욕을 맨 마지막 행선지로 권해본다. 뉴욕을 먼저 보면 다른 도시의 재미가 반감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도시의 도시가 가진 진면목을 다시 볼 날을 기대한다.

저작권자 © 숭대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