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의 대학교 순위를 매겨 이에 따라 대학을 평가하는 ‘대학서열주의’는 비단 어제오늘만의 일은 아니다. 과거부터 국내의 약 200여개 대학은 일렬종대로 세워져 있었으며, 이 순위를 놓고 대학생들은 끊임없이 다퉈왔다. 이 다툼은 단순한 유희나 장난이 아닌 매우 진지한 ‘투쟁’이다. 순위가 한 두 순위 차이나는 대학들을 ‘비슷한 대학’으로 묶는 순간, 순위가 앞서는 대학의 학생들은 몹시 흥분하며 논쟁도 불사한다. 서로가 주고받은 모욕으로 인한 법적 분쟁이 일어나기도 하며 심한 경우 물리적 폭력 사태도 벌어진다.

   그러나 이 학생들만 나무랄 수는 없다. 한국사회는 과정보다는 결과만을 중시하고, 이 결과의 가장 기초적인 잣대가 대학의 이름이다. 이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특정 대학 출신들이 형성한 카르텔도 무시할 수 없다. 이런 점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볼 때, 지금의 대학생들이 소속 대학의 순위에 집착하며 싸우는 모습을 그들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 이들은 결국 부조리한 사회구조의 피해자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해자인 대학생들이 오히려 이 구조를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동화된다는 ‘스톡홀롬 증후군’일까? 이에「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괴물이 된이십대의 자화상⌋의 저자인 오찬호 박사는 “지금 대학생들은 수능점수를 모든 능력의 차이로 확장하는 사고를 갖고 있다. 십대 시절 단 하루 동안의 학습능력 평가 하나로 평생의 능력이 단정되는 어이없는 불합리한 시스템을 문제시할 눈조차 없는 것이다.”라고 지적한다. 이 시스템이 지속되면 생기는 것은 결국 대학서열의 정점에 서있는 한 대학만을 제외한 나머지 대학들 간에 열등감과 멸시만 생길 뿐이다. 지금의 대학생들은 자신보다 하위권의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에게 우월감을 가지는 반면 상위권의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 앞에선 한없이 작아진다.

   더 큰 문제는 이런 감정들이 결국 오 박사의 말대로 사람을 ‘학교이름’만 가지고 판단하는 결과를 낳게 한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행동이나 말이 소속 대학에 따라 평가된다. 조금 극단적으로, 하위권 대학에 다니는 학생이 밥 먹다가 물만 흘려도 ‘그 대학 다니니까 그렇지.’라고 할 태세다. 만약 상위권 대학의 학생이 똑같은 행동을 했다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대학생들은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깨닫지 못한다. 이 차별은 ‘정당한 차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대학 입학이 모두 다 똑같이 치룬 수능시험에 따른 결과이며, 능력에 따른 차별이니 정당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관념에 근거한다.

   그러나 과연 단순히 수능시험 문제가 다 똑같다고 해서, 대학 입시가 평등하고 능력만으로 결정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수능시험을 보게되는 과정까지도 고려해봐야 하지 않을까?  이 과정에서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 학력서열주의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다는 통계들이 집계되고 있다. 일례로, 지난 2010학년도 서울대학교 신입생의 아버지 직업은 사무직·전문직·경영관리직이 전체 65%에 이르며, 비숙련 단순노동자는 0.9%에 지나지 않았다. 서울대학교 합격자 배출 상위 20개 고교 중 일반고는 3개에 불과했으며, 서울의 25개 자치구 중 서울대학교 합격자 70%가강남·서초·송파구에서 배출됐다.

   이렇게 과정이 공정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는데, 과연 이 결과에 따른 차별이 정당하다고 할수 있을까? 지금처럼 이 차별을 정당화하며 계속 받아들이게 된다면, 이는 결국 현 사회가 학력과 학벌의 세습에 따른 새로운 신분주의 사회라는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함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이 신분은 과거 사농공상의 신분보다도 훨씬 세분화되어 약 200여 개에 이른다. 심지어 같은 대학 소속 내에서도 입시 전형에 따라 그 신분이 갈리는 판이다. 이 촘촘히 짜여진 신분질서 속에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쇼군 중심의 막부체제를 종식시키고 일본의 근대화를 이루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는 젊은 시절 “같은 무사라고는 하나, 백 가지나 계급이 나뉘어져 있다. 아무도 그 계급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게 뭣때문일까? 일본에서는 쇼군 한 사람의 신분을 지키기 위해 3천만이 신분이라는 얼개에 묶여있기 때문이야.”라고 말한 바 있다. 그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당연시하게 생각했던 신분사회는, 돌이켜보면 이렇게 단 한 명의 의문으로 인해 바뀌기 시작했다. 우리도 이렇게 신분 제도와 크게 다를 것이 없는, 단 한 대학만을 위한 대학 서열에 얽매여 계속 집착할 필요가 있을까. 이에 얽매이면 얽매일수록 세상은 구조적 불평등과 차별의 나락으로 빠져들 것이다.

저작권자 © 숭대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