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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에서 시작하는 안데스 산맥(Cordillera de Los Andes)은 콜롬비아를 거치고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를 지나 칠레의 최남단까지 이어진다. 총 길이는 7천 킬로미터에 달하고 최고 높이는 해발 6천 미터가 넘는 안데스 산맥은 남미 대륙의 등뼈와 같은 존재이다. 안데스라는 이름의 등뼈 위에서 잉카문명은 스페인 정복자들이 나타날 때까지 번영을 구가하였고, 아무나 범접할 수 없는 이 웅대한 대간(大幹)에 의해 아마존으로 대표되는 동쪽 지역과 태평양을 바라보는 서쪽 지역으로 양분된다. 그리고 에너지 문제로 늘 앙숙인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자연적인 국경선이 된다. 칠레가 우파 정권이 오랫동안 득세한 반면, 아르헨티나에서는 좌파 정권이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산맥은 사람의 기질, 사상, 정치체제까지 변하게 만드는 원인일지도 모른다. 산맥이 아무리 높다한들 하늘 아래 존재하는 한갓 ‘뫼’일 뿐인데, 인간은 그 뫼의 지배를 받는 미미한 존재임을 다시 한 번 절감한다. 남미 여행을 하면서 늘 걱정했던 치안문제는 적어도 이 도시에서는 잠시 잊어도 되는 듯 했다. 17년간의 피노체트 독재정권이 시행했던 사회 정화운동의 효과를 저 멀리 한국에서 온 여행자인 내가 수혜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역사란 역설이며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칠레의 한 가운데 쯤에 위치에 있어 ‘칠레의 배꼽’이라는 별명을 붙이고 싶은 산티아고 데 칠레(Santiago de Chile)에 도착했다. ‘산티아고’라는 이름이 붙은 지명은 스페인에도 있고, 중남미의 다른 나라에도 존재하기 때문에 공항에서 비행기를 탈 때는 발음하기엔 길지만 반드시 행선지가 ‘산티아고 데 칠레’임을 밝혀주어야 한다. ‘9.11 테러’ 이후에 공항의 보안 검색이 강화되어 지금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만, 2001년 이전의 남미 여행자에게서 “페루에서 산티아고 행 비행기를 탔더니 쿠바의 산티아고(Santiago de Cuba)에서 내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브라질과 수리남을 제외한 남미의 모든 나라는 스페인의 식민 통치를 받아 유명한 도시나 건축물은 동일한 이름이 많은데, 이 때문에 이동할 때 혼란을방지하기 위해 각각의 나라 이름을 함께 붙여주어야 하는 원칙 아닌 원칙이 나에게는 참 생소했다.

  남미에서 가장 현대적인 도시임을 증명하는 프로비덴시아 지구의 고층 빌딩과 정복자 발디비아가 원주민을 효과적으로 학살하기 위해 건설했다는 요새 산타루시아 언덕(Cerro SantaLucia)은 이 도시의 관광 명소가 되었지만 한참을 감정의 경계선을 묘하게 넘나들며 생각을 요동치게 했다. 상인과 거리의 연주자들로 북적이는 아르마스 광장은 스페인의 도시 모습을 그대로 가져다 놓은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데, 잔인하기로 유명했던 정복자의 광기를 보는 것 같아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러나 이 도시를 병풍처럼 둘러 싼 안데스 산맥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내 귀를 열어 모든 것을 용서 했음을 알려주었다. 아무도 돌봐 주지않았지만 스스로 강인하게 피어난 야생화 같은 이 도시의 모습을 설명하는듯, 칠레의 산티아고가 잡초가 아닌 꽃인 이유는 침략과 독재의 아픔을 겪었지만 인간의 습성마저 변화시키는 거대한 산맥 너머에서 향기를 발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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