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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북서쪽 17구에 바티뇰이라는 동네가 있다. 19세기 중반까지 행정 구역상 파리외곽의 농촌 마을에 불과했다. 파리와 가깝고 월세에 저렴한 덕분에 화가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자연광이 풍부한 낮에는 그림을 그리고 해가 떨어지면 동네 카페에서 술추렴을 했다. ‘게르부아’라고 불리는 작은 술집의 단골 명단은 대충 이렇다. 마네, 모네, 드가, 시슬리, 모리조, 팡텡 라투르, 보들레르, 말라르메 등이다. 모두 화가와 시인이다. 그들은 정규 미술 대학을 제대로 마친 사람이 드문 터라 공식 전시회에 번번이 낙선했다. 학연, 지연이 다르고 화풍마저 제각기 달라 그들을 뭉뚱그려서 바티뇰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공식 전시회에 낙선한 그들이 따로 모여 전시회를 열었지만 번번한 대접을 받지 못했고, 나중에 어느 평론가가 빈정거리는 투로 그들을 ’인상주의자’라고 명명했다. 문학사에서는 보들레르와 말라르네, 미술사에서는 마네와 모네를 일컬어 ‘현대예술’의 출발로 삼는다. 인구밀도란 용어를 차용해서 문화 밀도란 말을 쓴다면 이 시절의 카페 게르부아는 문화밀도가 가장 높았던 곳이다. 20세기에 접어들어 문화밀도가 높았던 곳은 단연 몽마르트 지역이다. 지명이 뜻하듯 파리의 허름한 산동네인 이곳에 가난한 예술가들이 몰려 살았고 해질 무렵 그들의 집합장소는 역시 카페였다. 피카소, 모딜리아니, 로트렉이 본격적으로 예술 혼을 펼친 곳이 바로 이 동네이다. 몽마르트 예술가는 1차 대전으로 인해 흩어졌고 카페 중심지는 2차 대전이 끝나자 셍 제르멩 거리로 이동했다. ‘뒤 마고’를 비롯한 몇몇 카페에 사르트르, 카뮈 등이 몰려들어서 그 지역이 실존주의의 산실이 되었다. 사르트르는 거리의 철학자라 불릴 만큼 카페의 테라스에서 친분을 쌓고 글을 썼다. 철학자, 문인, 화가는 홀로 생각하고 따로 작업하는 터라 모일 기회나 장소가 없기 마련이다. 화가가 시인에게 영감을 주고 시가 음악으로 변하는 계기를 제공한 것이 다름 아닌 카페였다. 요샛말로 예술과 철학의 융합과 통섭이 자연스레 이뤄졌던 곳이다. 이제 파리의 카페는 그런 기능을 하지 못하고 프랑스도 더 이상 문화의 중심도 아닌터라 카페는 옛 시절을 기억하는 외국인들의 관광명소로 겨우 명맥을 유지한다. 그나마도 미국산 체인점의 등쌀에 얼마나 버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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