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쿄는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선진도시다.

만남의 광장 격인 시부야역은 하치코(ハチ公) 출구로 나와야 제 맛이다. ‘하치’라는 충견(忠犬)의 이름에 존칭으로서의 공(公)를 붙여 ‘하치코’라고 한다는데, 일본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이 개에 대한 이야기는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졌고 역 앞에 동상을 세우기까지 했다. 작은 것 하나에도 소홀하지 않고 무언가 의미를 부여하는 일본인들의 습성에 정감을 느낀다. 그러나 역 광장에서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반한시위’ 모습을 목도하였을 때는 만감(萬感)이 몰려왔었다. 새롭게 창조된 문화가 활활 타오를 것 같은 이 거대 도시의 한 복판에서 그들은 무엇이 두려워서 외국인에 대한 증오를 표출하고, 특히 한국에 대한 노여움을 뿜어내고 있단 말인가. 아이러니한 것은혐오 발언을 외쳐대는 그들의 얼굴이 왠지 단일(單一)한 사람들로 보이지않는다는 것이다. 단일하지 않은 사람들이 외국인 없는 순수한 일본을 외치는 것 자체가 비논리적이다. 그렇다고해서 이런 볼썽사나운 시위가 이 도시 도쿄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훼손할수는 없다.

 나는 한때 아키하바라 전자상가에 탐닉했었다. 이 상가에서 물건을 사기위해 주말마다 도쿄 여행을 한 적도 많았으니 ‘탐닉’이라는 말을 써도 그다지 과장은 아닐 것이다. 한국에도 속칭 전자상가란 곳이 있지만 아키하바라의 규모와 ‘디테일’과는 비교를 불허한다. 한국에서는 구할 수 없는 전자제품과 진귀한 프라모델, 그리고 100엔이면 살 수 있는 중고 LP판들은 이 도시로의 주말여행 경비를 꼭 계산기로 두드려보지 않아도 ‘손익분기점’을 맞추고도 남았다.

 신주쿠의 북적거리는 서민적 정취와 우에노 공원의 한적함은 절묘한 대조를 이루고, 하라주쿠에서 벌어지는 젊은이들의 길거리 공연과 ‘코스프레’의 신선함은 긴자(銀座)의 화려함과 비교되고, 롯본기 힐의 현대성은 메이지 시대 최초의 도시 공원이라는 아사 쿠사의 고즈넉함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나는 일본의 여러 도시를 다녀 봤지만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 심도 깊게 연구한 적은 없다. 하지만 현대성을 기본으로 옛 것과의 조화를 단절 시키지 않는 지혜의 단면을 도쿄에서 실감한 적은 많다. 똑같이 시끌시끌한분위기지만 모든 것이 제값을 주고 산 것처럼 느껴지는 아메요코 시장과 무 조건 값을 에누리해야 할 것 같은 남대문 시장의 차이 같은 것이라면 나만의 비약일까. 모든 것이 정확하게 움직이는 것을 현대성으로 규정하고 인간적인 냄새가 나는 것을 옛 것으로 말할 수 있다면 도쿄야말로 이 두 가지 속성을 모두 갖춘 도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가끔 벌어지는 엽기적 사건들은 예외로 하겠다.

 여전히 한류로 파생된 서비스와 상품이 가장 많이 소비되는 도시로서의 도쿄, 서울과 많은 점에서 비교되는 도쿄, 그리고 아직도 한국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은 도쿄를 생각한다. 누군가 한때 일본은 없다고 이야기 한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도쿄는 도쿄라고 나는 말한다.
 

저작권자 © 숭대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