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정상급 프랑스 요리 전문가이자 서래마을에 있는 정통 프렌치 레스토랑 ‘줄라이’의 대표 셰프. 한식대첩(2013년)과 올리브쇼 (2014년), 그리고 냉장고를 부탁해(2015년) 등의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이 시대 진정한 대세 셰프로 거듭난 ‘요섹남’ 오세 득. 그가 총학생회 초청으로 지난 5일(목)에 본교에 찾아와 강연을 했다. 승승장구했을 것만 같은 그의 인생도 여러 번의 시련이 있었다 는데, 지금부터 그의 인생 속으로 들어가 보자.

꼴찌, 여자친구, 요리-오세득의 10대

저는 반에서 성적이 가장 안 좋은 학생이었어요. 공부에 취미가 없었죠. 시험을 보면 정말 문제만 잘 보고 나왔어요. 많은 사람들의 성공 이야기와 장영실이나 이순신 등 위인들의 뛰어난 일화들 이 많잖아요? 그러나 그때의 저에게는 전혀 해당 하지 않는 이야기였어요. 그저 하루하루만 잘 넘 기는 게 꿈이었죠. 그렇게 무사안일하게 10대를 보내고 있던 어 느 날, 우연히 TV에서 ‘아메리칸 코리안’이라는 미국 프로그램을 봤어요. 요리사가 나와 출연자 들과 재미있게 요리하는 프로그램이었죠. 이때 요리사라는 직업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 각해봤어요. TV에서 정말 유쾌하게 요리하는 모 습이 멋있더라고요. 그러다가 제가 여자친구를 사귀게 됐어요. 매 번 제가 밥을 샀죠. 그때는 돈이 없어서 부모님한 테 문제집을 산다며 거짓말을 하고 돈을 받았죠. 그런데 부모님한테 너무 죄송한 거예요. 힘들게 버신 돈을 거짓말을 해서 타내고, 여자친구 밥이 나 사주고 있으니까 말이죠. 그래서 저는 결심했 어요. 더 이상 밥을 사주는 건 그만두자. 훌륭한 요리사가 돼서 여자친구에게 직접 맛있는 음식 을 만들어주기로 말이죠. 이 결심을 하고 대학을 조리과로 진학했어요.

대학교, 뉴욕, 일-오세득의 20대

제가 대학교에 다녔을 때는 조리과가 전국에 8 개 정도밖에 없었어요. 그만큼 요리사는 천대받 는 직업이었어요. 요즘은 매년 3만 명이 넘는 조 리과 학생들이 사회에 진출하고 있죠. 어쨌든 당 시에 천대받았던 직업인 요리를 전공했던 것은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여자친구의 영향이 컸어요. 그런데 제가 군대 복무를 하면서 헤어졌어요. 훈 련소에서 울더니, 그때 알아봤어야 했어요. 훈련 소에 들어갈 때 우는 여자친구들은 대부분 고무 신을 거꾸로 신는다고 하더라고요. 여기도 분명 훈련소 때 우셨던 여자분들 계실 거예요. 그 분들 분명 남자친구 못 기다리셨을걸요? 헤어지고 나니까 자격지심이 생기기 시작하더 라고요. 제가 잘되면 다시 여자친구가 돌아올 지 도 모른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하루에 20시간씩 일하고 공부했어요. 이상하게도 노동이라는 생 각이 안 들고, 전혀 힘들지도 않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저에게 기회가 찾아왔어요. 바 로 뉴욕행 비행기라는 기회죠. 말로만 듣던 아메 리칸 드림이 저에게 펼쳐지는 순간이었어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로 뉴욕으로 떠났어요. 가 보니 미국의 조리학교는 오전 8시에 수업을 시작 하더라고요. 학교랑 떨어진 곳에서 살았던 저는 6시 30분에 일어나야 했어요. 학교에 가서 8시부 터 1시까지 수업을 듣고, 끝나고 여기저기 시장 을 돌아다니다가 3시부터는 호텔에서 일을 했어 요. 호텔 일이 끝나면 자정쯤이었는데, 집에 와서 학교 공부를 하다보면 2시가 넘어갔어요. 영어를 잘했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영어공 부도 해야 했어요. 그래서 거의 잠을 잘 수가 없 어서 힘들었죠. 여러분 to 부정사 잘 아시죠? 저 는 to 부정사도 모르고 미국을 갔을 정도예요. 처 음에는 to를 부정한다고 생각해서, to 부정사가 ‘NO’의 의미인줄 알았어요. 농담이고요. 나름대 로 준비는 했었어요. 영어 단어책 한 권을 다 외 우고 미국을 갔는데, 이걸로는 많이 부족할 수밖 에 없죠. 아무튼 이렇게 2년을 살았어요. 계산해보니까 2년 동안 제가 남들보다 실질적으로 2년은 더 살 았더라고요. 다른 사람들보다 두 배의 시간을 들 여 일을 하고 공부했으니까요. 그래서 제게 미국 은 정말 기회의 땅이었어요. 이때 많은 걸 배우고 깨달았죠. 제 20대는 이렇게 열심히 달리는 시기 였어요.

사업, 부도, 방송-오세득의 30대

20대 후반에 한국에 다시 돌아왔어요. 그리고 김치냉장고 회사인 위니아 딤채 매장을 열었어 요. 제가 처음으로 리더가 된 거죠. 그 매장은 홍 보 매장이라 하루에 200명 이상이 와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어요. 처음 맡은 일이었지만, 성공적 으로 해냈어요. 1년에 8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왔 으니까 말이죠. 그래도 제 가게가 아니다 보니, 저에게 크게 남는 건 없더라고요. 그래서 몇 년 후인 2007년 6월 23일, 서래마을에 ‘줄라이’라는 음식점을 오픈했어요. 처음하는 식당이 뭐 잘됐 겠어요? 건물도 말아먹고 부도도 2번이나 났죠. 그러던 어느 날, 저를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 도 소년원에 있는 한 학생이 편지를 보내왔어요. ‘자기가 소년원을 나가면 요리를 하고 싶다’는 내용이었어요. 그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서 얘기 를 나눴는데 제게 편지를 보냈으면서도 저에 대 해서 잘 모르더라고요. 서래마을 줄라이의 오세 득이라고 소개를 하니까 ‘거기가 뭐하는 곳이냐? 기업이냐?’며 물었죠. 그때 제가 좀 알려져야 할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방송을 해야겠다 고 마음먹은 계기였죠. 이번에는 제 식당에 대해 얘기해 볼게요. 식당 이름인 줄라이는 여자들이 좋아하는 이름이지 만, 막상 식당에 와보시면 아저씨들이 많아요. 식 당의 특징은 우리의 제철 농산물로 프렌치요리 를 하는 것이죠. 제철에 맞는 우리 농산물을 얻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어요. 처음에는 농산물 정보와 요리 아 이디어를 인터넷에서 찾았어요. 그런데 인터넷 을 이용하다 보니 정보를 가장 빠르게 습득할 수 는 있었지만, 어느 순간 저도 모르게 남의 것을 따라하게 되더라고요. 아무리 좋게 만들어도 모 방에 불과한거죠. 이를 깨닫고 저는 저만의 방법으로 정보를 얻 기 시작했어요. 고속도로를 다니다 보면 톨게이 트에 ‘여기는 ~의 고장입니다.’라고 쓰여 있잖아 요? 예를 들어 ‘여기는 율무의 고향입니다.’라고 해볼게요. 그럼 저는 그것을 보고 여기에서 율무 음식을 제일 잘한다고 알려진 식당으로 가요. 거 기서 음식을 먹으며 어떻게 프렌치 요리로 활용 할 수 있을까 고민해 봐요. 그렇게 음식을 만들었 어요. ‘식당을 왜 서래마을에 지었냐’라는 질문을 많 이 하세요. 가게 입점 비용이 적게 들었기 때문이 에요. 좋은 위치에서 가게를 열면 돈이 많이 들어 가니까 질이든 양이든 요리에서 뭔가가 부족해 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돌이켜보면, 제가 잘못 생각했어요. 처음 개업 준비를 할 때 저는 제가 있었던 미국을 기준으로 생각했어요. 그곳 에서는 가게 위치와 상관없이 요리만 맛있다면 손님들이 잘 찾아오거든요. 그런데 한국은 아니 었죠. 더군다나 그때는 인터넷 블로그나 스마트 폰이 활성화 돼 있던 시절이 아니어서 요리가 아 무리 맛있어도 홍보가 잘 안 됐어요. 그래서 결국 2번이나 부도가 났어요. 30대를 돌아보면 뭘 했 는지 아무런 기억이 없어요. 가게를 살리는 데만 매달려 살았던 것 같네요. 그냥 일만 하면서 하루 하루를 버텼던 것 같아요.

방송과 교육- 오세득의 40대

전쟁같았던 30대의 나날을 보내고, 벌써 제가 40대에 접어들었어요. 요즘에는 방송 출연을 많 이 하고 있어요. 그런데 사실 저는 학생들에게 요 리를 가르치고 싶어요. 지금의 조리 교육은 실무 에 필요한 교육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워요. 자격 증을 취득하는 데만 맞춰져 있죠. 사실 자격증과 요리는 크게 상관이 없어요. 학생들에게 현장에 서 통할 수 있는 요리를 알려주고 싶어요.

여러분에게 해주고 싶은 말

저는 지금 식당 외에 다른 사업도 준비하고 있 어요. 요리와 관련된 사회사업이에요. 모든 사업 은 몇 개월 안에 승부가 나요. 그래서 기회가 왔 을 때 놓쳐서는 안 돼요. 그런데 준비를 안 하면 기회가 와도 잡지 못하고, 바람이 불어도 바람을 타지 못하죠. 제가 부도났을 때 집에서 요리를 많이 했어요. 어려운 시기에도 포기하지 않고 항상 준비를 해 두려는 자세였죠. 여러분도 인생을 살면서 힘든 시기가 분명히 올 거예요. 그때 절망하지 않고 준 비를 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은 훗날 분명히 차이가 나요. 여러분도 원하는 것이 있다면 차근 차근 준비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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