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토), 본교 한국기독교박물관은 강화도로 문화유적 답사를 떠났다. 강화도는 수도로 가는 길목이자 천연의 요새로, 고려시대에는 몽골족, 조선시대에는 프랑스군과 미국군에 맞서 선조들이 싸웠던 섬이다. 본 기자도 박물관의 답사에 동행했다. 늠름하고 용맹한 선조들의 기상이 어려 있는 강화도의 역사 문화지를 함께 탐방해 보자.

 

 

강화고인돌(부근리)
  지석묘(支石墓)로도 불리는 고인돌은 선사시대를 대표하는 무덤이다. 고인돌은 생김새에 따라 크게 탁자식과 바둑판식(기반식), 그리고 개석식으로 구분한다. 강화도에 있는 고인돌은 탁자식 고인돌이며, 땅 위에 4개의 받침돌을 세우고 그 사이를 막음돌로 둘러서 무덤방을 만들고, 덮개돌을 올렸다.

  고인돌은 북한 땅에 15,000여 기, 남한 땅에 30,000여 기가 있으며 이는 세계 고인돌의 40%에 달한다. 강화도에도 고인돌 150여기가 존재한다. 이는 강화도가 옛날부터 살기 좋은 곳이었으며, 이곳에 경제력을 가진 계층이 살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 계층의 사람들은 어떤 인물이었기에 이 거대한 무덤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인력을 동원할 수 있었을까? 지금은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인돌이 당시에는 힘없는 사람들의 고통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고인돌을 보며 마냥 감탄할 수는 없었다.

 

 

정족산성
  정족산성은 강화도 정족산에 있는 고성(古城)이다. 단군의 세 아들이 만들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삼랑성(三郎城)으로도 불린다. 이 성에서 조선후기인 1866년, 프랑스군을 물리친 바 있다. 당시 프랑스군의 무기는 조선군 무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최신식이었다. 하지만 양헌수 장군은 체력이 뛰어난 사냥꾼과 보부상을 모아 게릴라 전법을 활용해 프랑스군을 격퇴했다. 외국의 침략으로부터 승리를 거둔 곳이 흔치 않기 때문에 더 의미가 있다. 양헌수 승전 기념비 주위를 둘러싼 커다란 나무를 바라보니 프랑스군을 무찌른 양헌수 장군과 무명의 장수들이 여전히 강화도를 수호하는 것 같았다.

 

 

 

정족산사고
  정족산성 안에 설치한 정족산사고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한 곳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서울 △충주 △성주 △전주의 사고에서 보관했는데, 임진왜란 이후 유일하게 남은전주 사고의 실록이 정족산사고로 옮겨졌다. 정족산사고는 서울과 가까워 조정에서 이곳에 방문해 실록을 확인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정족산 사고를 부수고 실록들을 경성제국대학(지금의 서울대학교)으로 옮겼다. 지금 있는 정족산사고는 복원된 것이다. 정족산사고지에 보관돼 있던 실록은 조선 초기부터 기록한 것으로 그 역사적 가치는 매우 크다. 이 실록을 통해 우리 선조들은 올바른 역사를 남겨 무엇을 전하고 싶었을까 생각을 해보며, 위대한 역사기록이 있음에도 관심이 부족한 우리들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광성보
  광성보는 강화해협을 지키는 요새 중 하나로,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돌과 흙을 섞어 길게 쌓은 성이었다. 이후 조선의 제19대 왕인 숙종이 석성으로 개축했다. 

  이곳은 신미양요 당시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장소이다. 지휘관인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조선군은 열세한 무기로 미군과 싸웠는데, 포탄이 떨어지면 칼과 창으로, 칼과 창이 부러지면 돌과 맨주먹으로 전투에 임했다. 한 사람도 물러서지 않고 싸우다 결국 장렬히 순국했다고 한다. 바다를 등지고 ‘강화 전적지 정화기념비’와 성벽을 바라봤다. 뒤에서 들리는 파도소리가 마치 어재연 장군과 무명용사들의 함성소리 같았다.

 

 

성공회강화성당
  고종 37년(1900년), 대한성공회의 초대 주교인 Corfe C.J(한국명 고요한)가 설립했다. Corfe는 1889년 영국에서 최초의 한국 주교로 서품을 받았으며, 이후 조선에 들어와 대한 성공회를 만들었다. 서품을 받고 7년이 지난 1896년 6월, 강화도에서 첫 한국인 세례자가 나왔다. 이를 계기로 Corfe는 강화도에 성당을 건립했다.

  성공회강화성당의 내부공간은 서양의 기독교 건축 형식인 바실리카 양식을 띠고 있다. 반면 겉으로 드러난 모양은 한국의 불교 사찰과 유사해 동·서양의 아름다운 건축 양식들이 조화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성공회강화성당의 모습에서 조선사회의 특수성을 인정하며 적응하려던 선교사들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외규장각
  조선왕조는 빈 터가 된 고려궁지에 임금이 밖으로 나갈 때 임시로 머무르던 행궁(行宮)을 만들었다. 조선의 제22대 왕 정조는 행궁 근처에 외규장각을 설치하고 왕실의 서적을 보관했다. 이곳에는 국가와 왕실의 주요 행사 내용을 기록해 둔 의궤(儀軌)를 비롯한 총 1,000여 권의 서적이 있었다. 하지만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군이 철수하면서 외규장각에 있던 의궤를 포함한 서적들을 약탈하거나 불태웠다. 이후 1999년 한국과 프랑스 정부는 외규장각 도서 반환 협상을 했고, 2010년 11월에 프랑스가 한국에게 ‘대여’하는 방식으로 반환에 합의했다. ‘외규장각 도서가 우리나라에 있지만 이를 과연 되찾아 왔다고 말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고려궁지
  고려궁은 고려왕조가 몽골이 공격해 왔을 때 수도를 옮겨 방어하기 위해 만든 성이다. 성 안에는 본궁인 연경궁을 비롯해 14개의 주요 건물 및 부속 건물들을 지었다. 고려궁의 뒷산이 당시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지금의 개성)의 송악산이라 불릴 정도로 고려궁은 개경의 궁궐과 비슷하게 지어졌다. 또한 내성, 중성, 외성의 3중으로 성을 견고하게 쌓아 몽고의 공격을 대비했다.

  하지만 1270년 고려왕조는 몽고에 항복하고 개경으로 돌아갔고, 이후 성과 궁궐은 허물어져 방치됐다. 현재는 정문인 승평문(昇平門)만 남아있다. 홀로 남은 승평문을 보자 고려왕조가 몽골군에게 항복한 뒤 떠나가는 쓸쓸한 모습이 그려졌다. 그들은 이 문을 나가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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