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는 사람은 드물다. 방황의 시간을 극복하고 큰 비전을 발견하는 사람은 더더욱 드물다. 해외로 나가 당당히 넓은 세상을 발견한 조현아(기독교·10) 학우와 “봉사가 남을 위한 것이 아닌 자신을 위한 것” 이라고 말하는 박세진(경제ㆍ09) 학우를 인터뷰했다. 두 사람의 대학생활이 값진 이유는 스스로 부딪치며 도전했기 때문일 것이다. 본교의 건학이념인 ‘진리와 봉사를 세계로’를 실천하며 살고 있는 두 사람을 만나 보자.

 

  “의지와 노력으로 배낭여행의 꿈을 이룬 것처럼 직접 도전하고 부딪히며 제가 원하는 꿈을 이룰 거예요.”

  조현아(기독교·10) 양

 

 

  졸업을 앞둔 지금, 자신의 대학생활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저의 대학생활은 ‘배낭여행’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저는 해외로 배낭여행 가는 것을 참 좋아해요. 그래서 대학을 다니며 학교에서 지원해 주는 해외봉사 프로그램과 교환학생에도 참여했고, 18개의 국가로 배낭여행을 가기도 했어요. 심지어 예능 프로그램도 세계 곳곳을 소개해 주는 ‘비정상회담’이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꽃보다 청춘’을 좋아하고요.

  하지만 이런 저도 처음부터 배낭여행을 많이 갔던 것은 아니에요. 대학교 2학년 때까지는 한번도 해외에 나가지 못했어요. 그러다 우연히 기독교학과에서 실시하는 비전트립을 가게 됐죠. 비전트립이란 기독교의 발상지를 직접 답사하고 현지 교회와의 만남을 통해 선교문화를 경험하는 프로그램인데 일정 외의 시간에는 여행도 할 수 있었어요. 그때 미국의 보스턴과 뉴욕 그리고 올란도를 방문했는데 그 여행이 제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던 것 같아요. 이 여행을 통해 외국인들과 소통하며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학교가 운영하는 어떤 프로그램에 참여했나요? 그리고 그 프로그램은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나요?

  2학년 때 7+1 봉사프로그램으로 라오스에 갔다 왔어요. 라오스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쳐주거나 태권도와 같은 한국 문화를 알려줬어요. 또 한국인 선교사님의 집을 수리하거나 라오스 학생들과 게임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요. 그 2주가 너무 즐거워서 ‘아, 이런 일이 나에게 잘 맞는구나!’하는 것을 느꼈어요.

  라오스에서 마지막 날에 설문조사를 했는데 라오스 학생들이 생각하는 한국의 이미지는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나라였고 우리 학교의 이미지는 정말 좋은 학교였어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학교 학생들이 그 아이들에게 가장 많은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었거든요. 그 설문조사를 보면서 제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이렇게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며 살고 싶다는 인생의 목표가 정해지게 되었어요.

  그리고 2년 후인 4학년 1학기에 독일로 교환학생을 가게 됐어요. 가기 전에 고민을 많이 했어요. 교환학생을 가려면 돈도 많이 들고 영어 공부도 해야 하는데 부모님의 지원을 받기 어려운 상황이었거든요. 그런데 1학년 때부터 저를 잘 챙겨주셨던 교수님께서 저를 설득하셨어요. 교수님께서는 “현아야 너는 할 수 있어. 이 좋은 기회를 포기하지 말렴.”이라고 말씀하시며 용기를 북돋아 주셨어요. 결국 교수님의 응원에 힘입어 교환학생을 결심했어요.

  교환학생을 준비하면서 가장 먼저 돈을 모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영화관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어요. 학교를 마치고 일을 하다 보니 오후 8시에 시작해 새벽 2, 3시가 돼서야 일이 끝났죠. 집에 도착하면 새벽 4시였어요. 다음날 수업이 있으니 아침에 학교를 갔어요. 이런 생활이 반복됐죠 그렇지만 이를 악물고 버텨 2년 동안 천만 원을 모았어요. 물론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안에도 틈틈이 영어학원을 다녔죠. 열심히 영어 공부해서 시험을 보고 교환학생에 지원할 수 있었죠.

 

  독일에서의 생활은 어땠나요?

  독일에서 교환학생이 듣는 수업은 모두 영어로 진행됐어요. 하지만 영어를 잘 못 알아들어 힘들었죠. 그래서 수업 내용을 항상 녹음해 두고 이해할 때 까지 반복해서 들었어요. 그래도 못 알아듣는 부분이 있으면 수업 끝나고 교수님께 질문하거나 함께 교환학생을 온 친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죠. 가장 재밌었던 수업은 ‘기업윤리’였어요. 하나의 기업이 어떻게 윤리적으로 경영되며 이런 기업윤리가 사회에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는가를 연구하는 수업이었어요. 수업은 기업윤리에 관한 다양한 사례를 배우고 이에 대해 토론하는 방식으로 굉장히 흥미로웠어요.

  수업 외에도 독일로 공부하러 온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과 어울려 파티를 즐기는 일도 재미있었어요. 각자 자기 나라의 음식을 만들어 와 함께 나눠 먹었던 일도 가장 기억에 남아요. 또 한 달에 한 번은 학교에서 파티를 했는데, 그 시간에는 각자의 자신들의 나라에 대해 발표했어요. 서로 다른 나라의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어요. 저는 우리나라를 소개하면서 우리 학교도 함께 소개했어요. 학교 캠퍼스와 수업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고, 그 발표를 들은 학생 두 명이 지난 학기 우리 학교로 교환학생을 왔어요.

  원래는 교환학생으로 독일에 한 학기만 머물 수 있었어요. 그런데 저는 한 학기만 있기가 너무 아쉽더라고요. 다행히 제가 미래에셋 교환학생 장학금과 성적장학금을 받게 돼서 원래 등록금으로 내려했던 돈을 모아 한 학기 더 남기로 했어요. 제가 머물던 곳이 독일 드레스덴 동부에 있는 작센 주였는데 그 옆에는 체코와 폴란드가 있고 기차를 타면 헝가리 부다페스트를 갈 수 있고 버스로는 암스테르담을 갈 수 있는 좋은 지리적 위치에 있었어요. 덕분에 한 학기 동안 계속 여행을 다닐 수 있었죠.

 

  여행을 다니면서 특별한 일을 겪은 적 있나요? 혹은 느꼈던 것이 있나요?

  제가 여행을 다니며 느꼈던 여행의 묘미는 두 가지예요. 한국에서 멀리 떨어져 여행을 하며 내 사람들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 번 느끼는 것, 그리고 여행을 가서 만난 다른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지켜보는 것이에요. 여행을 다니면서 어떤 삶이 정말 행복한 것일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또 여행의 장점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에요. 독일에 교환학생 갔을 당시에 방학을 맞아 한국인 친구 두 명과 2주간 독일 뮌헨으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어요. 뮌헨의 유명한 맥주집 호프브로이하우스에 갔었는데 마침 자리가 없어서 한 노부부와 합석하게 됐죠. 제가 워낙 처음 만난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는 걸 좋아해서 그 때도 먼저 말을 걸었어요. 한국과 독일의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통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어요. 저는 “독일도 한국과 똑같이 분단국가였지만 지금은 온 국민이 통일을 기념하는 것이 참 신기하다. 우리나라는 여전히 남과 북으로 나뉘어 있다. 통일이 되어서 이산가족들이 함께 지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어요.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노부부는 떠나면서 짧은 시간 동안 좋은 대화를 할 수 있어 즐거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노부부는 저희가 남긴 전화번호로 “꼭 한국에도 통일이 하루빨리 와서 국민들이 더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문자도 남겨주셨어요.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지만 소중한 추억을 만들었다는 것이 신기해서 아직까지 기억에 남아있어요.

 

  앞으로 계획이 어떻게 되나요? 가지고 있는 꿈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여행을 다니며 느낀 것들이 제 진로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어요. 저는 라오스에 다녀온 뒤로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을 하고 싶다고 계속 생각해왔어요. 그리고 독일에서 공부하며 독일이 사회복지나 기업윤리가 굉장히 발전되어 있는 나라라는 것을 알게됐죠.

  그렇기 때문에 대학원에 진학해 기업윤리에 대해 공부하거나 독일에 있는 사회복지직업학교(원하는 분야에 대한 실무적인 경험을 쌓고 본인 직업이랑 관련된 회사나 공장에서 실습을 하도록 도와주는 전문 학교)에서 소셜 워크를 공부하고 싶어요. 소셜 워크는 난민들과 이민자들을 교육시켜 사회에 정착시키고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업이에요. 저는 현장에서 발로 뛰며 난민들과 이민자들을 직접 돕고 싶어요. 의지와 노력으로 배낭여행에 대한 제 꿈을 이룬 것처럼 직접 도전하고 부딪히며 제가 원하는 비전을 찾아갈 거예요.

 

 

  “더 나은 ‘나’를 위해 계속해서 봉사할 거예요”

  박세진(경제·09) 군

 

 

  대학 다니면서 유독 봉사활동을 많이 했어요. 어떤 봉사활동을 주로 했는지, 그리고 봉사활동을 하게 된 이유를 여쭤보고 싶어요.

  봉사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특별하진 않아요. 1학년이 끝날 때까지는 봉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어요. 그러다 전역 후 2학년 때 봉사센터 근로 장학생을 신청하게 됐죠. 봉사센터의 경우 장애지원센터와 연결되어 복합적으로 업무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봉사센터에서 근로를 하다가 장애학생지원센터로 넘어가 장애학생들을 보조하는 일도 했어요.

  학교에서 운영하는 해외 봉사 프로그램도 참여해 총 4곳의 나라를 다녀왔어요. 몽골, 인도, 필리핀, 라오스 총 4곳은 해외봉사 스태프로 참가했고, 7+1 프로그램으로 필리핀을 다녀왔어요. 필리핀은 한 번 다녀왔지만 스태프가 아닌 일반학생으로 해외봉사를 가보고 싶어 가게 됐어요. 봉사센터 근로 장학생으로 있다 보면 해외봉사를 준비하는 학생들을 마주치는 일이 많아요. 그 전까지만 해도 봉사활동은 자신의 스펙을 위해 봉사 시간을 채우는 활동으로만 여겼어요. 그런데 해외봉사를 위해 열심히 연습하고 준비하는 학생들을 보니 해외봉사에 관해 자연스럽게 관심이 가더라고요. 특히 우리 학교 해외봉사는 프로그램을 학생 자체적으로 기획해 가는 경우가 많다 보니 더욱 관심이 갔어요.

 

  장애지원센터에서 장애학생들을 어떻게 도왔나요? 도와주면서 특별히 느낀 점이 있나요?

  장애지원센터에는 여러 친구들이 있어요. 우선 시각장애를 가진 학생은 교수님이 진행하시는 수업 내용을 귀로만 듣고 써야 해서 수업 필기가 매우 느려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수업 중간 중간 학생이 놓친 것을 대신 말해주며 필기를 도와줘요. 그 외에도 몸이 불편해 혼자 밥을 먹지 못하는 학생들의 식사를 도와줘요.

  저는 대학 생활 중 3년을 봉사센터와 장애지원센터에서 보냈어요. 꽤 긴 시간을 장애학생들과 함께 했죠. 함께 한 시간이 길었던 만큼 추억도 많아 저에게는 매 순간들이 굉장히 소중해요.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요. 장애지원센터에서 장애를 가진 학생들과 근로학생들이 다 같이 용산에 모여 영화를 본 적이 있어요. 그 중 한 뇌병변장애(뇌성마비나 뇌손상으로 인해 발생한 신체적 장애)를 앓고 있는 학생이 혼자 휠체어를 타고 영화관까지 오기 힘든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그 친구가 사는 목동으로 데리러 가 함께 영화관까지 왔죠. 함께 길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눴던 그 일이 아직까지 기분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네요.

  제가 장애학생들을 대할 때 꼭 지키려고 하는 것들이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장애학생들을 비장애인처럼 대하는 거예요. 그리고 또 하나는 장애학생들에게 도움을 줬다고 해서 고마움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 학생들은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고 그들보다 덜 불편한 제가 친구들을 돕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장애학생들이 도움을 받을 때마다 고맙다는 표현을 한다면 저는 오히려 마음이 더 불편할 것 같아요.

 

  해외봉사를 5번이나 다녀왔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어디였나요?

  몽골, 인도, 필리핀은 학생들을 통솔하는 스태프 자격으로 2주 동안 다녀왔어요. 그리고 라오스는 한 달 정도 갔다 왔죠. 그런데 막상 해외에 나가서 봉사를 해보니 2주나 한 달은 너무 짧아서 아쉬웠어요. 그래서 그 이후에 4개월로 이루어진 7+1 필리핀 해외봉사를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죠. 또 스태프가 아닌 일반 학생으로 참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멀리 떨어져서 학생들을 통솔하고 관리하는 스태프보다는 봉사 학생이 되어 같은 조 친구들과 함께 봉사 프로그램을 직접 기획해 보고 싶었죠. 그래서 7+1 필리핀 해외봉사는 스태프가 아닌 일반 학생으로 참가하게 됐어요.

  그래서인지 가장 길게 다녀왔던 7+1 필리핀 해외봉사가 유독 기억에 남아요. 필리핀에서는 두마게티라는 작은 섬을 방문했어요. 5명의 봉사 학생들이 일인당 2과목씩 맡아 한국어, 영어, 음악, 미술 과학 등을 가르쳤어요. 저는 수학과 체육을 가르쳤죠. 봉사 학생들은 자신이 가르치는 수업이 끝나면 다른 학생이 가르치는 수업의 보조교사로 서로를 돕기도 했죠. 아이들은 8~90명으로, 연령대는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5학년까지 다양했어요. 우리 봉사 학생들은 그 학교 아이들 전체를 맡아서 가르쳤기 때문에 조금 힘들었지만 봉사를 끝내고 나니 무척 뿌듯했어요.

  그 중에서도 아이들이 저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좋았어요. 아이들을 가르치고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가지면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에 대한 책임감이 생겨 더 열심히 했어요.

  필리핀 아이들은 대체적으로 착하고 순수하지만 개발도상국에서 자라 상대적으로 부족한 형편이었죠. 그렇다 보니 상대방에게 양보하기보다는 자신들이 먼저 하려는 욕심이 종종 있었어요. 배드민턴 채가 두 개밖에 없을 때 함께 공유하거나 쉽사리 양보하지 않아 힘들 때가 종종 있었죠. 그래서 체육을 가르치면서 아이들에게 순서를 꼭 지키게 했고, 팀 활동을 통해 공동체 의식을 가르치려고 노력했어요.

 

  7+1 필리핀 해외봉사가 즐거웠던 만큼 힘들기도 했을 것 같아요.

  7+1 필리핀 해외봉사 도중 한 친구와 가르치는 방식에 관해 사소한 의견 충돌이 있었어요. 사실 사람마다 가르치는 방식이나 가치관은 다르기 때문에 의견 차이는 당연할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필리핀 친구들을 가르칠 때는 학생들에게 혼동을 주거나 한 선생님만 좋아하게 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에 교육 방식을 통일해야 하죠. 이런 점들이 조금 어려웠어요.

  7+1 해외봉사 외에도 육체적으로 힘들었을 때가 있었어요. 바로 라오스에서 학교를 건축한 일이에요. 봉사기간인 한 달 내내 새벽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일을 하니 얼마나 힘들겠어요. 특히나 여학우들은 엄청 힘들어했어요. 그래도 몸은 힘들었지만 봉사하는 학생들의 얼굴에 웃음이 넘칠 만큼 분위기는 즐거웠어요. 게다가 현지 근로자 분들과 몸짓 언어로 소통하며 함께 땀 흘리며 일하니 더욱 돈독해지는 기분이었어요. 사실 육체적인 노동이 몸은 고되지만 열심히 일한 만큼 마음은 더 편하거든요. 저한테는 육체적 노동이 더 잘 맞는 것 같아요(웃음). 그래도 그동안 학교가 없어서 공부를 하지 못했던 라오스 아이들이 우리가 지은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생각에 더 열심히 했고 매우 기뻤어요.

 

  요즘에 스펙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 사람들에게 봉사활동을 통해 얻은 것들을 소개해 준다면?

  사실 요즘엔 자기소개서에 한 줄 더 쓰기 위해 봉사활동을 하는 분들이 많죠. 저 역시 처음에는 봉사에 대한 열정이 없었지만 도움을 받고 행복해하는 친구들의 모습이 기억에 남아 계속 봉사를 할 수 있었어요. 스펙을 위해 봉사하는 학생들도 처음에는 별 생각 없겠지만 봉사를 통해 보람과 즐거움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해요.

  제 대학생활을 돌아봤을 때 가장 자신 있게 내세울 수 있는 건 봉사활동이에요. 어떤 사람들은 봉사활동은 다른 사람을 위해 하는 거라고만 생각해요. 그러나 저는 그 누구도 아닌 제 자신을 위해 봉사를 계속 했어요. 봉사를 통해 겸손해지고 싶었고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이제 대학을 졸업하면 앞으로 어떤 봉사활동을 할지 계획하진 않았지만 앞으로도 더 나은 ‘나’를 위한 봉사는 계속할 거라는 것만은 분명해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 있나요?

  이런 즐거움을 찾게 도와주셨던 이기문 전 봉사센터팀장님 봉사센터 교직원분들, 그리고 저의 인생에 큰 추억을 안겨준 장애지원센터 학생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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