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3·1절이다. 3·1절은 우리나라가 일본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역사적인 날이다. 1919년 3월 1일 정오에 서울 종로에서 민족대표 33명 중 29명이 독립을 선언했다. 오후 2시부터는 서울 종로 탑골공원(구 파고다공원)에서 학생들과 일반 시민들 5천여 명이 독립을 선언하고 밤늦게까지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3·1운동을 기점으로 전국적으로 독립운동이 확산됐으며 이는 26년간 계속된다.

  이처럼 독립투사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의 자유를 누릴 수 없었을 것이다. 3·1절이 돌아오면 사람들은 태극기를 달거나 순국선열의 묘를 방문하기도 한다. 하지만 과연 형식적인 관행에 치중하지 않고 3·1절의 진정한 의미를 기리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3·1절을 기념해 이번 호에서는 독립투사에 대한 감사함과 민족의 자주정신을 일깨워보는 시간을 가지려 한다. 지금부터 민족독립의 역사를 품고 있는 서대문 형무소를 찾아가 보자.


  민족의 한이 깃든 서대문 형무소를 방문하다
  서대문 형무소는 우울한 역사를 간직한 장소다. 일제는 을사조약 이후 조선의 국권 침탈을 위해 5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우리나라 최초 근대식 감옥을 지었다. 그리고는 국권을 회복하고자 투쟁했던 독립투사들을 가뒀다. 이것이 서대문 형무소의 시작이다. 개소 초기에는 500여명 정도였던 수감인원이 3·1운동으로 인해 3,000여 명에 달하게 되었다. 당시 조선 전국 형무소의 수용 인원이 대부분 500여 명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서대문 형무소의 규모가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광복까지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수감됐고 그 가운데 상당수가 옥사에서순국했다.

  본 기자는 옷깃을 여미고 서대문 형무소를 방문했다. 굳게 닫힌 철문과 낡은 벽돌, 그리고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이라는 빛바랜 글자들. 쓸쓸하고 암울했다. 방문객도 얼마 없었다. 그저 몇 안 되는 노인들이 천천히 서대문 형무소 주위를 돌고 있었다. 본 기자는 경건한 마음을 갖고 출입구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전시관에는 독립운동가의 수감 자료인 수형기록표를 모아서 전시해 놓았다. 그들을 기억하고 추모하자는 의미에서였다. 1919에서 1944년 사이에 기록된 수형기록표에는 독립운동가 4,837명의 △나이 △출신 지역 △죄명 △형량 등이 담겨 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사진을 보니 절로 숙연해졌다.

  지난해 서대문 형무소 박경목 역사관장은 6,259장의 수형기록표를 분석해 논문을 낸 적이 있다. 유독 눈에 띄는 자료는 15세 학생 11명을 포함해 10대가 462명(10.5%)이나 된다는 것이었다. 박 역사관장은 “10대가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할 정도로 이 시기가 한국인들에게 평범한 삶을 보장해주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수형기록표에서 앳돼 보이는 소녀들의 사진을 보자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 당시 시대 상황은 평범한 삶을 보장해 줄 수 없을 뿐더러 대부분의 국민들은 개인의 행복보다는 나라의 독립을 우선시했다. ‘독립’이라는 대의를 위한 의로운 분노야말로 3·1운동을 가능하게 했던 원동력이자 암울한 시대 가운데 빛나는 희망 한줄기였다. 독립투사들의 의로운 희생과 용기에 감사하며 머리 숙여 묵념했다.

 

 

  끔찍한 고문 현장과 비참했던 옥사 생활, 그 와중에도 꺼지지 않는 불빛

  형무소에 들어가서 가장 먼저 전시관을 관람했다. 전시관 1층에는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지 운용실태와 서대문형무소의 변화 과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2층에는 민족저항실로 옥에서 고문을 할 때 사용했던 도구를 전시했다. △수감자에게 채웠던 수갑 △노역 시 수감자의 허리에 채워 탈주를 방지한 요 △수감자들의 신체 특성을 기록해 그린 인상급 특징표 등을 볼 수 있었다.

  또한 전시관 지하에는 애국지사들을 고문했던 임시구금실과 고문실이 재현돼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녹슨 철창 사이로 보이는 고문도구였다. 뾰족한 가시가 달린 네모난 상자 고문과 몸을 거꾸로 매달고 코에 고춧가루 물을 붓는 고문 등 말로 다 할 수 없는 일제의 잔혹함이 그림과 모형으로 나타나 있었다. 또한 일제의 잔혹함을 증언한 사람들의 영상도 있다. 취조 과정에서 고문을 받고 2년 4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 고(故) 이병희 지사는 영상 증언을 통해 “재연한 고문은 고문도 아니다. 비행기고문, 물고문은 수시로 받았다.”며 “더 심한 고문은 자손을 끊으려고 하는 고문이다. 남자의 성기에 막대를 꽂았고, 여자의 성기는 막대기로 휘저었다. 차라리 죽여 달라고 할 정도였다.”고 증언했다.

  전시관을 나와 수감자들이 갇혀 지낸 옥사와 그런 옥사 전체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간수들의 공간인 중앙사를 둘러보았다. 소수의 간수들이 다수인 수감자들을 효율적으로 감시하기 위해 중앙사와 제10, 11, 12옥사가 연결된 부채꼴 모양을 하고 있었다. 실제로 중앙사에 있는 간수 감시대에 서서 바라보니 모든 옥사가 한눈에 들어왔다.

  12옥사에는 한 명도 채 들어갈 공간이 없는 작은 독방과 8명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방이 있었다. 일본군은 8명이 들어갈 만한 작은 방에 30~40명의 수감자들을 막무가내로 수용했다고 한다.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찬바람이 쌩쌩 부는 옥사에서 독립운동가들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11옥사 복도에서는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마주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의 재개관을 축하하며, 독립운동가들이 자신의 발자국 프린팅과 함께 ‘폭력과 억압에 분노하고 투쟁할 것’을 당부하는 글을 남겼다.

  어느 시대나 그 시대를 관통하는 정신이 있다. 그래서 시대가 바뀌면 시대정신 또한 바뀐다. 하지만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절대 바뀌지 않는 정신도 있다. 서대문 형무소에 깃든 3·1정신, 독립운동가들의 투쟁정신이 그러하다. 폭력과 억압에 굴복하지 않고 독립을 위해 제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불의 앞에서 더욱 빛나는 투쟁정신 덕분일 것이다.

 

  착취와 학대 앞에서 더욱 강해지는 독립투사들

  옥사를 나와 공작사와 사형장, 그리고 시체처리실을 방문했다. 공작사에서 수감자들은 하루에 14시간 가까이 강제 노역을 해야 했다. 일제는 수감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해 식민지배에 필요한 각종 관용물품 및 군수용품을 조달했다. 서대문 형무소의 공작사에서는 주로 벽돌과 의복을 생산했다. 독립군들은 오전 6시에 기상해서 오후 5시까지 작업을 했다.

  서울의 형무소에 수감된 독립투사들은 공작사에서 벽돌을 만든 뒤 ‘京(서울 경)’ 문양을 남겼다. 그런데 밖으로 나와 벽돌 길을 따라 걷던 중 그 문양이 찍힌 벽돌을 발견했다. 9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지만 이 벽돌만은 전혀 퇴색하지 않았다. 이 길은 독립투사들이 묵묵히 깔아온 한맺힌 길이었다. 수십 년이 지나도 낡지 않은 이 벽돌처럼 그들의 견고한 의지도 변하지 않으리라. 벽돌이 건물을 받치고 길을 만들듯이 독립투사들의 참된 희생은 우리 젊은이들이 올바른 시대로 나아가도록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 것이다.

  독립운동가들이 잠들어 있는 추모비를 지나 사형장을 방문했다. 사형장은 이름만큼이나 섬뜩하고 황량한 모습이었다. 사형장 담장을 사이에 두고 미루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사형수들이 사형장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미루나무를 부둥켜안고 울부짖어서 ‘통곡의 미루나무’라고도 불렀다. 사형수들의 눈물을 마시고 자라서인지 바깥쪽 미루나무가 안쪽의 미루나무보다 절반 이상 자라 있었다. 미루나무는 한 세기 동안 사라진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지켜 본 역사의 산 증인이었다.

  3·1운동은 당시 사람들에게 독립에 대한 간절한 염원이자 투쟁이었다. 우리는 서대문 형무소를 방문해 독립투사들의 자취를 보는 것만으로도 절박했던 그 당시를 볼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은 지울 수 없는 아픔의 역사다. 그러나 단순한 아픔을 넘어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을 찾아야 한다. 3·1절을 기념하는 이유도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밝은 미래를 맞이하기 위해서다. 독립이라는 작은 불빛으로 어둠을 밝혔던 선조들의 정신을 본받아 어둠을 밝히려는 우리의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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