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가 내뿜는 매연을 스쿠터를 개조해 만든 ‘툭툭’의 뒷좌석에서 한껏 들이마실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 급히 오느라 미처 준비하지 못한 항균 마스크가 못내 아쉽다. 에어컨과 문이 달린 ‘진짜’ 택시를 타고 싶건만 그 많은 택시들은 어디에 숨었는지 모르겠다. 택시의 형태를 갖춘 ‘탈 것’을 발견하더라도 운전사와 치열한 가격 ‘협상’을 벌여야 한다. 미터기가 버젓이 달려있는데 협상을 벌여야 한다니 좌절의 연속이다. 내가 여행자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눈치 챈 택시기사는 터무니없는 가격을 제시하며 흥정의 서막을 올린다. 여행자는 이 중생(衆生)들의 지갑을 채워주는 물주(物主)이고 보시(普施)하는 불자(佛子)인 것인가. 불교의 나라 스리랑카의 수도 콜롬보에 도착했지만 몸과 마음이 좌불안석(坐不安席)이다. 여행 전에 적지 않은 돈을 결제하고 예약한 호텔에 도착했는데, 호텔 주인은 방이 없으니 다른 곳으로 데려가 주겠다고 한다. 이쯤 되면 짜증을 폭발시킬 몸 속의 연료도 없고, 한국에서 만난 순진해보였던 스리랑카 노동자들의 이미지도 벌써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없다.

  트럭을 개조해 만든 버스는 굉음을 내며 끊임없이 매연을 내뿜고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매연이 만든 짙은 안개 속에서 유유히 활보한다. 26년간 내전을 겪으면서 8만여 명의 사상자를 낸 아픈 기억 때문에 스리랑카를 ‘인도양의 눈물’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고, 거대한 인도 대륙의 남쪽에 위치한 작은 섬이 마치 대륙이 쏟아내는 눈물같이 보인다고 하여 그렇게 부르는 사람도 있다고 하지만, 정작 나는 흥정에서 오는 피곤함에 눈물을 흘리고, 시커먼 매연에 다시 한 번 눈물을 흘린다. 도심에서 몇 분만 걸어 나가도 맑고 푸르른 인도양이건만 눈에서는 따가운 눈물이 흘러나오는 아이러니한 일의 연속이다.

  울며 겨자 먹기로 하루에 61달러의 ‘거금’을 주고 택시와 운전사를 대여하기로 했다. 외국인은 어디를 가나 입장료를 내야 한다는 불편한 상황에 적응해가며 몇 군데 사원을 돌아보고 있는데, 비로샤라는 이름의 택시 운전사는 묻지도 않았는데 본인이 싱할리(Sinhalese)족임을 알린다. “나는 타밀족이 아니라 싱할리족이에요.” 그는 왜 나에게 스스로를 싱할리족이라고 설명하는 것일까. 나는 누가 싱할리족이고 누가 타밀족인지 구별할 수도 없고, 종족의 구분 자체가 의미 없는 일이지만 그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인 것 같다. 작은 섬나라에서 싱할리족은 정부군으로, 타밀족은 반군으로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며 많은 사상자를 만들어 냈다는 그의 설명에 한국전쟁이 연상된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던 중에 뜻 깊은 말을 하는 비로샤. “싱할리와 타밀은 전쟁을 벌일 이유가 없었어요. 두 종족 간에는 결혼도 많이 있었고, 내가 학교에 다닐 때는 친한 친구가 타밀족이었어요. 하지만 영국이 식민 지배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우리를 이간질시킨 것은 명백한 사실이에요.” 현재의 대한민국에 사는 나에게 많은 여운을 남기는 그의 말.

  스리랑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기 전에는 실론(Ceylon)으로 불리며 마르코 폴로도 극찬했던 이 신비한 섬이 내전의 아픔을 극복하고 인도양의 눈물이 아닌 인도양의 보석이 되기를 바란다. 콜롬보는 보석을 밟는 새로운 문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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