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여름, 여느 때와 같이 수장고에서 새로운 유물을 등록하는 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먼지가 수북이 쌓인 나무 상자 안 유물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종이에 싸인 진흙 덩어리가 툭 튀어 나왔다. 처음에는 토기편으로 생각해서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밀하게 살펴보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바로문자가 보였기 때문이다.


  이 유물은 문서를 봉인할 때 사용한 봉니였던 것이다. 우리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봉니는 ‘증지장인(增地長印)’으로 낙랑군의 증지현과 관련된 봉니이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의 1점과 우리 박물관 1점 등 2점만이 확인된 매우 희귀한 유물이다. 비록 네글자만 있는 작은 점토 덩어리이지만 2,000년 전 보안 시스템을 직접 보여주는 유물로 평가받고 있다.

  봉니는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부터 본격적으로 유행한 문서 봉인용 진흙이다. 당시에는 종이가 없었기 때문에 대나무나 목간에 행정문서를 작성하였다. 이 행정문서를 지방에 보낼 때는 노끈으로 묶어서 매듭 부위에 진흙을 붙이고 인장을 찍어 봉인하였다. 즉 봉니는 문서의 위조 및 변조를 방지하기 위해 고안된 최첨단 보안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봉니는 낙랑군의 위치 문제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현재 고고학계와 사학계의 정설은 평양 일대에 낙랑군이 있었다고 본다. 일제 강점기에 평양 일대를 조사한 일본학자들은 다수의 낙랑 봉니를 수집하면서 낙랑군의 위치를 평양으로 비정하였다. 일반적으로 봉니가 발견되는 곳은 발신지가 아닌 수신지이다. 따라서 평양지역에서 낙랑의 봉니가 발견되는 것은 오히려 평양 일대가 낙랑군이 아님을 반증하는 것이다. 우리는 3cm밖에 되지 않는 작은 진흙 덩어리를 통해 2,000년 전 보안시스템과 마주하게 된다. 또한 봉니는 베일에 싸인 역사적 사실을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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