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10일(목) 정조대왕의 즉위일을 기념해 송내어울마당 소사시민학습원에서 정조대왕에 관한 인문학 특강이 열렸다. 이날 초대 강사인 한신대학교 정조교양대학 김준혁 교수로부터 정조의 개혁정신과 백성을 사랑하는 민본정신, 그리고 수원 화성에 대한 풍성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강의에 따르면 정조는 타고난 개혁가였다. 그는 백성을 사랑하며 나라의 발전을 고민할줄 아는 참된 군주였다. 동시에 예를 중시하고 사람의 평등한 권리를 추구할 줄 아는 좋은 사람이었다. 이번 강연이 조선시대 배려와 존중의 아이콘이자 개혁의 인재였던 정조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아픔과 고난으로 얼룩진 정조의 인생


  정조는 “할 일은 많은데 해가 서산으로 지고 있다. 내 운명이 쇠하고 내 몸이 죽어가는 것이 느껴진다.”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정조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격했는데 이로 인해 정조는 한평생 정통성을 회복하고 죽기전까지 할 수 있는 바를 다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죠.


  사도세자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은 뒤 사도세자의 아들이었던 정조에게도 그 여파가 전해졌어요. 8글자의 흉흉한 말이 돌기도 했죠. ‘죄인지자 불위군왕(罪人之子 不爲君王): 죄인의 (사도세자) 아들은 왕이 될 수 없다.’는 노론파의 반대에 겨우 즉위한 정조는 역적의 아들이라는 시선 하에 어릴 때부터 항상 감시를 받았어요.

  왕실의 가족들도 정조에게 우호적이지 않았어요. 정조의 할머니인 정순왕후는 그녀의 오빠 김귀주와 함께 정조의 즉위를 반대했어요. 그러나 정순왕후는 굉장히 정치를 잘했던 사람이라 결과적으로 정조의 즉위에 찬성하는 입장을 보였죠. 둘 사이에 화해의 기미가 보였지만 김귀주가 영조에게 “현재 중전인 정성왕후가 양자를 들이고 싶어 한다.”는 내용을 건의하면서 다시 사이가 멀어져요. 만약 이 건의가 받아들여졌다면 정조는 양자의 아들로 호적이 바뀌고 자신의 즉위를 반대하는 사람들에 의해 유배를 가거나 죽었을 거예요. 영조 역시 그것을 알았기에 이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죠.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 앞서 말했던 8자 흉언 ‘죄인지자 불위군왕(罪人之子 不爲君王)’에 8글자를 덧붙여 16자 흉언이 떠돌았어요. ‘태조자손 하위여위(太祖子孫 下位餘威): 태조 이성계의 자손이면 누군들 어떠하리’ 이는 왕의 정통성과 도 직결된 문제였기 때문에 정조가 민감할 수밖에 없었죠.

 

  “백성이 그들의 권리를 찾고 똑똑해질 수 있게 만들 것”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했어요. 그러나 그 당시 왕실에서는 한글을 백성들에게 배포하지 않았어요. 정조가 왕이 된 이후에 백성들이 본격적으로 한글을 사용할 수있었죠.

  1788년 전염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고아들이 생겼어요. 이때 정조는 각 지방 수령들이 고아들을 열 살까지 길러야 한다는 법을 만들었어요. 또한 젖을 먹어야 하는 갓난아이를 위해 다른 엄마들이 젖을 주도록 지시했어요. 그 대가로 돈과 식량을 두 배로 쳐줘서 백성들의 구휼을 도왔어요. 바로 이러한 법들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해 각 마을에 붙였어요. 백성이 한글을 통해 법을 제대로 알고 활용할 수 있도록 말이에요.


  또한 정조는 정부에서 새로 나오는 무예서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했어요. 무과에 급제하려면 무예만 잘해서는 안 돼요. 1차에서는 실기평가, 2차는 병법서로 시험을 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무과에 응시하려는 자는 손자병법과 오자병법 등 무예서를 공부해야 해요. 지방의 뛰어난 무인들은 한문을 모르니 병법서를 공부하지 못했죠.


  이를 안타깝게 여긴 정조는 무경칠서라는 7개의 병법서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해 백성들에게 제공했어요.


  정조는 정책의 목표로 백성들을 똑똑하게 만드는 것을 정했어요. 조선시대 국왕들 대부분이 조선을 칭할 때 ‘내 나라’, ‘아국(我國)’이라고 부르는 반면 정조는 ‘백성의 나라’라는 뜻의 ‘민국(民國)’이라는 용어를 썼죠. 이런 점에서도 백성을 위하는 군주의 자세가 드러난다고 할 수 있어요.

 

  나라를 개혁하기 위해 신도시를 건설하라!

  나라를 위한 개혁을 하기 위해 정조는 역적의 자식이라는 딱지를 떼야만 했어요. 아무리 정조가 문무를 겸비하고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더라도 관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는 정통성이라는 한계를 극복해야 했어요. 그래서 정조는 아버지를 국왕으로 추대해 정통성을 획득하는 동시에 아버지를 모신 자리에 신도시를 건설하기로 마음먹었어요.

  사실 영조는 사도세자가 죽은 뒤 두 달 만에 정조의 세자책봉식을 거행했어요. 그러나 동궁책봉문서에는 “동궁(정조)이 장차 왕이 되더라도 절대 선 세자(사도세자)를 국왕으로 추천하지마라.”는 내용이 기록돼 있었죠. 정조는 처음에는 스스로 아버지를 국왕으로 만들려고 했으나 문서에 쓰인 내용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아들에게 그 역할을 맡겼어요. 아들이 15세가 되면 왕위를 물려준 다음 자신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대하게끔 하려고 했죠. 또한 아들에게 정권을 맡기고 본인은 상왕(현왕(現王) 이외에 전왕(前王)이 살아 있을 경우 전왕을 부르던 호칭)이 되어서 국가개혁에 힘쓰려고 했어요. 태종과 세종이 그랬거든요.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줬지만 즉위 직후 4년간은 인사권과 사법권, 그리고 군대통수권을 갖고 있었어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문효세자가 열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한 이후 정조는 38세가 될때까지 아들이 갖지 못했어요. 그러던 중 1789년에 정조의 고모부 박명원이 “전하에게서 세자가 나오지 않는 이유는 사도세자의 묘가 불길해서 입니다.”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고, 그 덕분에 정조는 아버지의 묘를 수원으로 옮길 수 있는 명분을 얻어요. 그 이후 신기하게도 순조를 낳게 되었죠.


  1789년 10월 12일, 정조는 삼정승, 육조판서 등 천 명 가까이 되는 관료들과 함께 하루 종일 수원에 내려가 아버지의 묏자리를 확인하고, 15일에 그 자리로 아버지 묘소를 옮겼어요. 조선시대에 왕세자릉을 나흘 만에 결정한 것은 유일무이한 사건이에요. 그런 다음 수원 도읍의 관아를 팔달산 쪽으로 옮겼어요. 이는 반계 유형원이 팔달산 북쪽 넓은 들판에 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쌓으면 서울을 방비하는 대도시가 될 거라고 반계수록에서 서술했기 때문이에요.

  정조는 수원에 화성을 2년 반 동안 쌓았어요. 사도세자의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화성행궁을 호위하기 위해서였죠. 화성행궁은 정조 본인이 머물기 위해 만든 처소였어요. 본래 정조는 서울은 주상의 수도로, 수원은 상왕인 자신의 수도로 남겨둘 예정이었어요. 그리고 화성행궁에 머무르며 △신해통공(모든 백성이 장사를 할수 있게 허용하는 제도) 시행 △금난전권(상인들이 상권을 독점하기 위해 정부와 결탁하여 난전을 금지할 수 있었던 권리) 폐지 △사농공상(조선시대의 직업에 따른 사회계급) 철폐 △외교관계 발전을 통한 항로 개척 △지방공무원 봉급제도 개혁 등의 개혁정책을 펼치려 했어요. 화성행궁은 개혁 중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방편이 었고요.

 

   “인간은 평등한 존재” 노비제도의 혁파를 주장하다


  정조의 업적 중 눈에 띄는 것은 노비제도 혁파론이에요. 당시에는 노비도 재산의 일부였기 때문에 1800년 1월 정조가 노비제도를 혁파하겠다고 선언하자 정치인 모두가 반대했어요. 그러나 정조는 반대하는 신하들에게 이렇게 얘기했어요. “인간으로 태어나서 어찌 귀한 자가 있고 천한 자가 있는가. 이 세상에 노비보다 슬픈 존재는 없다. 노비제도는 반드시 혁파되어야 할 관습이다.” 하지만 관료들은 자신의 재산을 잃기 싫어했고 결국 정조는 국가 관청에서 일하는 공노비를 반으로 줄이는 것으로 타협을 했어요. 완전한 사노비의 혁파는 다음을 기약했죠.

   정조는 노비를 줄이는 등 개혁정책을 위해 국가의 돈을 아끼려고 노력했어요. 왕위에 즉위한지 6일째 되는 날부터 “하루에 두 끼만 먹겠다, 한 끼당 반찬을 세 가지 이상 먹지 않겠다.”고 선언을 하고, 누명 옷을 빨아 입고 꿰매 입었죠. 그 외에도 궁녀 수를 800명에서 300명으로 줄이는 등 다양한 절약을 했어요.

  결국 정조는 1801년도 1월에 노비제도 혁파안 을 통과시킬 수 있었어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법 통과시킨 지 5개월 만에 죽음을 맞이했죠. 다행히 선왕(정조)의 뜻을 계승해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져 관청소속인 공노비의 문서들을 창덕궁 앞에서 사흘 동안 태우는 등 개혁의 의지가 계속되지만 정조의 뜻대로 개인노비까지 혁파하는데는 무리가 있었어요. 만약 그랬다면 우리는 세계 역사에 남을 평등한 사회를 이룰 수 있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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