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부패에 빠진 고려왕조를 멸하고 조선을 개국한 혁명가 이성계는 자신의 본관(本貫)이 전주임을 잊지 않았다. 왕위에 올라 태조가 된 그는 전주를 한양, 개성과 함께 3경으로 승격시켰으며, 그의 아들 태종 이방원은 이 도시에 경기전(慶基殿)을 건립하여 이성계의 어진(御眞)을 모셨다. 세계적으로도 드문 500년 왕조의 발원지 전주에 도착하여 도시에 감도는 영웅의 힘을 느낀다. 도시는 영웅을 배출하고 영웅은 자신의 고향에 권력을 불어 넣는다. 전주는 한고조 유방의 고향인 풍패처럼 제왕의 도시가 되고 지금까지 풍패지향(豐沛之鄕)이라 불린다. 제왕의 도시는 불의에 저항하지만 온화하며 강렬한 힘을 표출하지만 품격을 잃지 않는 이미지를 지녔다. 이런 품격은 예술로 승화되어 예도(藝都)로서의 전주를 만들어 내었다. 이름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유명 인사들이 전주에서 배출된 이유다. 

  예술영화로 유명한 장률 감독님의 초청을 받아 전주국제영화제를 참관하러 왔지만 내가 정작 관심이 있는 것은 ‘전주의 맛’이었다. 명화(名畵)를 보는 ‘눈의 즐거움’보다 전주 음식이 주는 ‘혀의 즐거움’에 더 애착이 가는 나는 역시 예술적 소양이 떨어지는 인간이다. 그러나 강산도 식후경이고 미각의 도시 전주에서 먹는 즐거움을 먼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스스로에 대한 작은 자학(自虐)을 멈춘다. 유명한 집을 추천받고 싶지만 행사장을 멀리 떠날 수도 없어 근처에 있는 콩나물국밥집에 들어가 주문을 했다. 작게 썬 오징어와 김 가루, 공기에 따로 나온 계란, 그리고 정갈한 반찬들. 서울에서도 많이 먹었던 콩나물국밥인데 왜 이곳에서는 어떤 순서로 먹어야 제대로 먹는 것인지 어리둥절했던가. 타지에서 온 사람의 티를 팍팍내고 있는 나와 그 상황을 놓치지 않고 친절하게 먹는 순서를 알려주는 전주의 아가씨. 전주 사람들은 남녀노소 하나같이 친절하다. 

  서울로 올라오는 아침에 전주한옥마을을 방문했다. 보슬비가 내리는 한옥마을의 모습은 고즈넉한 여유를 즐기는 양반의 모습이었다. 모든 것을 빨리하는 현대인에게 한옥은 ‘느림의 미학’을 전해주는 것 같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마저 서울의 그것과는 달리 느적느적 내려와 우산도 없는 나를 더디게 적셔댄다. 시간만 허락한다면 마을 안에 있는 한옥에서 하루만 더 묵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입구 앞에 길게 늘어선 줄 때문에 미처먹어 보지 못한 풍년제과점의 빵은 더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전라도는 전주와 나주의 머리글자를 따서 만든 행정 구역의 이름이다. 올해 가족과 함께 전주와 나주 지방 여행을 하면서 전주에서 해보지 못한 것과 호남지방의 정취를 다시 느껴볼까 한다. 

  품격 있는 양반의 풍모, 어진 속에 존재하는 제왕의 모습, 진정한 한국 음식의 맛을 느끼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전주여행을 권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도시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착한 심성과 친절한 태도이다. 제왕의 권위, 양반의 여유, 오감을 자극하는 음식도 결국은 도시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언행에서 시작되고 유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주는 나에게 도시와 여행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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