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儉而不陋 華而不侈(검이불루 화이불치)” 검소 하지만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 이는 고려의 역사가였던 김부식이 <삼국사기 >에서 백제를 설명했던 말이다. 본지 기자는 절제된 아름다움을 가진 백제의 문화를 알아보기 위해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던 충청남도 부여로 향했다. 그리하여 독창적인 문화를 꽃피웠었던 찬란한 백제의 모습을 지면에 담아봤다. 

부소산성, 자연에 맞닿다

부소산은 부여군 부여읍에 있는 해발 106m의 산이다. 동쪽과 북쪽은 가파르고, 백마강과 맞닿아 있어 자연의 요새로 불렸다. 부소산의 이름은 <세종실록지리지>에서 처음 발견할 수 있다. ‘부소(扶蘇)’의 뜻은 백제의 언어로 ‘소나무’라는 뜻이 있기 때문에 백제시대 때 부소산은 ‘솔뫼’라고 불렸다는 설이 있다. 백제의 도읍은 고구려 도읍을 본 떠 평지에 궁궐을 지었다. 유사시에는 인근에 있는 산성으로 피신하여 공격에 방어할 수 있도록 조성했다. 이 산성은 평상시에 왕과 태자들이 즐겨 찾는 뒤뜰 역할을 했다. 왕과 태자들은 이 뒤뜰에 모여 여러 잔치를 열었다고 한다. 궁궐과 산성 주변에는 의자왕의 삼천궁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절벽에서 뛰어내렸다는 일화로 유명한 낙화암 등 왕족과 관련된 여러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하지만 부소산성 주변에 있는 사비시대 왕궁의 정확한 위치와 전체적인 범위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가 장 유력한 왕궁의 위치는 바로 사적 제428호인 관북리 유적이다. 부소산성 바로 아래에 있는 관북리 유적지는 원래 금동 제품을 만드는 왕실 수공업생산지였던 것으로 추정되었고, 조사를 통해 관북리 유적의 주변이 궁궐의 터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 터들의 위치를 보고 대략적인 왕궁의 구조를 추측할 수 있게 됐다. 넓은 평지의 관북리 유적은 당시 백제의 궁궐의 모습이 얼마나 웅장했을지 짐작케 했다. 그러나 유적지에 아무런 설명 없이 돌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곳이 많아, 전문가의 설명이 없이는 이 돌들이 어떤 건물의 터였는지 짐작하기가 쉽지 않았다. 

소원이 머물던 절

사적 제301호로 지정된 정림사지는 538년에 성왕(백제 제26대 왕)이 도읍을 사비로 옮기면서 도읍의 정중앙에 지은 절이다. 정림사지는 중문과 탑, 금당(부처님을 안치 하는 건물)과 강당(불교의 경전을 가르키는 장소)이 남쪽과 북쪽에 일직선으로 있고, 강당 좌우에 부속건물과 중문을 연결하는 회랑(절 주요 부분을 둘러싼 지붕이 있는 긴 복도)이 둘러싸고 있다. 이 배치는 정림사지뿐만 아니라 부여에 있는 다른 사찰에서도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전형적인 사비시대 백제의 사찰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정림사는 이름을 알지 못하는 절이었다. 그러다 정림사지 5층 석탑 1층에서 백제 멸망 당시 당나라 총지 휘관이었던 소정방이 ‘평제기공문’이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승리에 대해 쓴 글이 발견돼 ‘평제사’와 ‘평제탑’이라고 불렸다. 이후 1942년 유적발굴조사에서 발견된 기와에 ‘태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라는 글이 있는 것을 보고 태평 8년에 정림사라고 불렸다는 것이 확인됐다. 이후 지금까지 정림사지로 불리고 있다. 정림사지는 관북리 유적지와 다르게 많이 복원돼 있고 바로 근처에 정림사지 박물관이 있어 정림사지의 모습과 탑의 의미를 이해하기가 무척 쉬웠다. 본지 기자는 지금은 연못과 탑, 그리고 건물 한 채가 남은 절터를 돌면서 1400년 전 당시 살았던 백제인들은 이 절을 돌면서 어떤 소원을 빌었을까 잠시나마 생각해 봤다. 

피어 오르는 과거의 향

국립부여박물관은 1929년에 설립된 부여고적 보존회를 기원으로 한다. 이후 1975년에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승격되고, 1993년 8월에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국립부여박물관이 소장한 유물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유물은 국보 제287호로 지정된 백제금동대항로이다. 백제금동대항로는 향을 피울 때 쓰는 향로로써 부여 능산 리 백제시대 절터에서 출토되었다. 향로의 뚜껑은 중첩된 형태의 산악으로 묘사되어 있고, 그 위에는 날개를 활짝 편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한 마리의 봉황이 서 있다. 봉황 바로 아래 즉 뚜껑의 제일 위쪽에는 5명의 악사가 각각 금, 완함, 동고, 종적, 소 등의 5가지 악기를 연주 하고 있는데, 악사들은 악기를 연주하는 독특한 자세를 취한 채, 연주하는 모습이 실감나게 표현돼 있다. ‘백제 금동대항로’를 보면서 백제인들이 꿈꾸었던 이상세계가 어떠한지 단편적이게나마 알 수 있었다. 백제의 가장 대표적인 유물 중 하나인 ‘백제금동대항로’를 소장한 박물관답게 어린이박물관에는 ‘백제금동대 항로’와 관련된 체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백제인의 의복을 체험할 수 있는 코너가 가장 인기가 많았다.

고분에 깃든 선조들의 혼

사적 제14호로 지정된 능산리 고분(과거 및 현재의 무덤 중에서 역사적 자료가 될 수 있는 분묘)군은 능산리 산 중턱에 있다. 능산리 고분을 발견했을 당시 앞줄에 3개, 뒷줄에 3개로 6개였으나, 이후 1기가 더 발견되어 지금은 총 7기의 고분이 있다. 특히 중앙에 있는 고분들이 사비시대 왕들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1호 무덤에는 사신도(동쪽의 청룡, 서쪽의 백호, 남쪽의 주작, 북쪽의 현무를 그린 그림) 벽화가 그려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고분군은 일찍이 도굴을 당해 발견된 유물이 거의 없으며, 도굴자들이 버린 파편 몇 점만 발견됐다. 백제의 고분들은 신라의 것들과 비교해서 도굴된 무덤이 많다. 도굴되지 않았다면 더 많은 백제의 유물을 알 수 있었을 텐데… 우리 선조들의 유적들을 더 엿보지 못해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저작권자 © 숭대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