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0년대부터 세계 2차 대전이 종결될 때까지의 시대를 풍미한 사회진화론은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뒷받침이 되었다. 사회진화론에 따르면 우등한 민족이 열등한 민족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무엇이 우등하고 열등한 것의 경계선이 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국주의자들의 눈에는 그들이 만든 무기와 군함이 우등한 것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열강(列强)이라고 불리는 국가들은 아프리카 평원에서 사자가 얼룩말을 사냥하듯 순박하게 자연과 더불어 살던 사람들에게 폭력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북마리아나 제도(Northern Mariana Islands)를 구성하는 이 섬도 스페인에게 점령당한 후 독일에게 매매되었고, 일본은 독일을 힘으로 밀어내고 이곳에 전쟁 기지를 만들었다. 물론 지금은 2차 대전의 승전국인 미국의 자치주가 되어 있다. 산업화를 이루지 못한 것은 열등한 것이고 열등한 것은 미개한 것으로 간주되었던 그 시대의 상황논리가 인간사의 아픈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다.

  기분 좋게 그것도 ‘너무나 기분 좋게’ 사이판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모 잡지사에 보낸 응모엽서가 당첨이 되어 사이판 3박 4일 자유여행권을 받았기 때문이다. 돈을 내고 와도 충분히 좋을 사이판에 ‘공짜’로 온 것이니 마음속은 흥분 그 자체였다. 1990년대 중반은 사이판과 괌이 해외여행의 필수 코스인 것처럼 각광을 받았다. 서울에서 4시간이면 도착하는 데다가 미국의 자치주임에도 불구하고 받기 까다로운 미국 비자를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럽 여행은 가격이 높아 지금처럼 활성화되지 않았고, 가까운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정확한 정보도 없이 막연하게 치안과 각종 질병을 우려하던 때라서 더더욱 그랬다. 북태평양의 끝자락에서 환상적인 자연과 하와이 수준의 편리한 위락시설, 그리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여행비용이 정확히 맞아 떨어진 결과였다.

  여행사를 통해 이미 출국일과 귀국일이 정해진 여정이어서 이틀은 해양 레저 스포츠와 정글 투어를 즐기고 마지막 하루에 사이판에서 꼭 보아야 한다는 명소를 둘러보기로 했다. 사이판에 무슨 정글이 있냐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화산분화로 이루어진 이 섬의 협곡 사이로 토착 원주민이 거주하는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로 진입하는 입구에 우리가 생각하는 휴양지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정글이 웅장하게 펼쳐져 있다. 제트 스키를 즐기는 동안 강력한 적도의 자외선이 내 몸을 검게 그을려 놔서 그런지 처음 만난 원주민 청년과 나는 거의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사이판에서의 마지막 행선지는 ‘만세절벽’이었다. 왜 이곳이 관광명소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1944년 미군이 사이판에 상륙했을 때 끝까지 저항하던 일본인들이 ‘덴노헤이카 반자이(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고 하는데, 한국인인 나에게는 오히려 치욕의 역사를 보는 듯했다. 그들의 죽음이 숭고하고 아름답다는 말인가.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미화된다는 말인가. 그러나 절벽으로 몰아치는 강한 바람이 역사의 아픔조차 책의 한 페이지처럼 넘겨버리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으며 자연의 무언(無言)과 너그러움에 숙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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