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던 민주화 운동 대열에 본교는 거의 빠지지 않았다. 그 대열에서 본교 학생들 중 민족,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쳐 열사라 불리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현재 우리와 각기 다른 시대, 다른 삶을 살았지만 죽음으로써 귀감이 된 분들이다. 열사들은 행동하는 양심으로 상처투성이인 군사독재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민주화의 장을 만들기 위해 별이 됐다. 별이 된 열사들의 삶을 살펴보자.

박래전 열사 (1963~1988)

"광주는 살아있다. 청년학도여, 역사가 부른다. 군사파쇼 타도하자."

 

 

 이는 1988년 6월 4일 박래전 열사가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분신하기 전 외친 말이다. 박 열사는 1987년 6월 항쟁으로 직선제를 쟁취하고 군사독재를 무너뜨렸음에도 불구하고 노태우 재집권으로 군사독재가 회기할 것을 우려해 자신의 생명을 불꽃으로 태우는 분신을 감행했다.

 박 열사는 경기도 화성 출신으로 1982년도에 본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다. 박 열사가 본교에 입학했을 당시에는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시절로 학생 자치 활동을 감시하는 학도호군단이 존재했기 때문에 학생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에 박 열사는 학생들과 함께 집단적 투쟁을 통해 학도호국단을 철폐하고 자주적 학생회를 건설했다. 덕분에 1988년 인문대학 학생회장으로 선출됐다. 그리고 그해 6월, 학생회관 옥상에서 온몸에 신나를 뿌리고 민주화를 위해 분신했다. 분신 즉시 한강성심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전신 대부분이 3도 화상을 입어 이틀 후인 6일 오후 12시에 폐혈증으로 사망했다.

 박 열사는 분신 전에 작성한 유서를 통해 광주학살 원흉을 차단하고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서는 전국의 백만 학생들이 일어나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의 사망일인 6일 저녁에는 학생들이 모여 장례 일정이 결정되고 장례위원회가 구성됐다. 장례위원 고문으로는 김대중, 김영삼 등 당시 정치계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그의 시신은 사망한 직후 본교 건물에 마련된 빈소에 안치됐다가 12일 ‘민중 해방열사 故 박래전 민주국민장’으로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됐다.

 이후 1990년 9월 2일 박래전 열사의 뜻을 계승하기 위해 ‘박래전기념사업회 발기전대회’가 유가족 및 학생 150명이 참여한 가운데 교내에서 열렸다. 기념사업회는 현재까지 교내에서 고인의 뜻을 기리고 있으며, 다음 달 3일(금) 4시 미래관 앞에서 박래전 열사 20주기 추모식이 열린다. 이 사업회는 1994년 4월 7일, 분신 6주기를 맞아 ‘박래전기념비’를 도서관 옆에 건립한 바 있다.  

 

박현민 열사 (1967~1992)

"한 생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무수한 죽음을 맞는다. 더욱이 예속과 독재의 폭압에 맞서 싸우려는 식민지 조국의 청년에게는 삶과 죽음이 너무도 밀접하다."

 

 

 이는 1991년 8월 21일 박현민 열사가 쓴 일기다. 박 열사는 1987년 6월 항쟁 당시 본교 교정 밖에서 민주화를 위한 시위에 참가하다 3도 화상을 입는 등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박 열사는 1967년 부산 출생으로 1986년도에 본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본교에 입학해 민주화 운동을 진행했고, 1988년에 본교의 기독학생회 회장을 역임했다. 이후 다음 연도에는 총학생회 집행부를 지냈다. 박 열사는 1989년 12월에 군에 입대하였으나 군에서 얻은 병으로 제대했다. 하지만 학교 측은 ‘일반휴학 후 군입대하여 휴학기간이 초과되었다.’는 이유로 박 열사를 제적 처리했고, 이에 불의를 느낀 박 열사는 ‘미등록 제적생 복직 대책위’를 구성해 복적 투쟁을 전개하였다. 박 열사는 92년 학원자주 투쟁에서 ‘미등록 제적생 전원 복적 요구’와 ‘비민주적 학사행정의 개선’을 위해서는 재학생과 함께 하여야 한다는 마음으로 등록금 투쟁에 적극 동참하였고, 추운 겨울에도 학생회관에서 꼬박 밤을 지새웠다. 새벽까지 토론을 통해 마련된 내용들은 다른 간부들이 피곤에 지쳐 잠이 들면 박 열사 혼자 남아 다음 날까지 유인물 작업을 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노력은 등록금 투쟁을 준비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결국 1992년 4월 2일 과로로 쓰러져 입원하여 40여 일의 투병 끝에 운명했다. 이후 장례는 학생장으로 치러졌으며 이듬해 6월 제6기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영웅상을 받았다. 1993년 4월에는 본교 명예복적증서를 수여받고 그를 기리기 위한 동상이 건립됐다.

 

김창섭 열사 (1939~1960)

"피아노를 잘 치는 얌전하고 조용한 학생으로 기억되는 김창섭 열사"

 

 

 1960년 4월 19일 오전 9시 30분. 당시 본교 학생이었던 김창섭 열사는 김순경 동문이 이끄는 대열 중 한 명으로 학교를 나섰고, 그날이 본인 생의 마지막 날이 됐다.

 김 열사는 전라북도 금산에서 출생했으며, 1956년에 대전대학(현 한남대학교) 성문학과에 입학했다가 1959년에 본교 사학과에 3학년으로 편입했다.

 1960년 4월 19일,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 길이 남을 혁명이 일어난 날이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사람들은 독재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으로 피를 흘렸다. 이날 김 열사도 시위에 참가했다. 한강대교에서 트럭에 올라 광화문 사거리로 진출한 김 열사는 데모대의 선두에서 정부의 부정선거를 규탄하던 중 서울역 건너편에서 쏘는 경찰의 무차별 사격으로 허리에 관통상을 입고 현장에서 즉사했다. 이후 바로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으로 이송됐다.

 이틀 후 세브란스 병원에서 학교 측으로 연락을 취해왔다. 김 열사의 시신이 병원 지하에 있으니 찾아가라는 것이었다. 4월 19일 민주화 시위에 참여했던 학생위원회 간부들은 세브란스 병원 지하로 찾아가 40~50여 구의 시신 가운데 김 열사의 시신을 찾아 시신을 싣고 학교로 돌아왔다. 김 열사의 장례는 같은 해 4월 22일 유족을 비롯한 많은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과학관(현 베어드홀) 앞에서 학교장으로 거행됐다. 김 열사의 동기들은 김열사가 피아노를 잘 치는 얌전한 학생이었다고 전했다.

 1960년 6월에는 김창섭동지순국기념사업회가 발의‧발족됐으며, 교정에 기념비를 세웠다. 그리고 2년 뒤 1962년 4‧19 2주년 기념식전에서 건국포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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