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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글자인 한글의 가장 큰 어려움은 동음이의어를 때에 따라 문맥에 맞게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외국어에도 동음이의어는 있지만 우리말에는 유독 많은 것 같다. 도시 전주(全州)와 돈을 빌려 준 전주(錢主), 그리고 전봇대를 의미하는 전주(電柱)는 조금의 다름도 없이 모두 ‘전주’로 표기되지만 각 상황에 따라 뜻이 완전히 달라진다. 누군가 “나의 고향은 광주입니다.”라고 말을 하면 사람들은 으레 경기도 광주(廣州)인지 전라남도 광주(光州)인지를 묻는다. 내가 오늘 말하려는 광주는 ‘빛’ 광자를 쓰는 빛고을 광주다. 아직도 다 치유되지 않은 민주화를 위한 항쟁의 아픔을 간직한 광주이기도 하다.


  1980년 5월 18일, 아무런 정통성을 확보하지 못한 채 정권을 탈취한 신군부는 계엄군을 이 도시로 보내어 민간인을 무참히 학살하는 만행을 자행하였다. 계엄령 확대를 반대하는 시민들은 폭도로 규정되었고, 자국의 군대는 국민을 보호하기는커녕 국민에게 총알을 퍼부었다. 스스로의 목숨을 자위(自衛)하려는 광주시민들은 총검으로 찔리고 무차별 곤봉세례를 받아 머리가 터졌다. 5월의 광주는 처참했고 암울했으며 사망자를 애도하는 통곡소리와 부상자의 신음소리가 난무하는 비극의 현장이었다. 긴 세월이 지나 신군부의 수장이었던 사람들은 법의 심판을 받았고 광주에서 벌어졌던 사건의 진상이 규명되었으나 아직도 모든 아픔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실로 오랜 만에 민주주의의 빛을 뿜어내는 광주로 내려왔다.


   지금은 전시공간으로 변모한 옛 전남도청 건물과 많은 향토 희귀자료가 소장된 아시아 문화의 전당으로 가기 전에 허기가 몰려와 지하철역 근처에 있는 소머리국밥집에 들어갔다. 다양한 메뉴 중 무엇을 먹을지를 묻는 나에게 “아무거나 니 맘대로 쳐 드셔잉” 이라고 말하며 빙그레 웃는 식당 아주머니의 농담 사투리가 새롭다.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도 분위기에 걸맞은 농담을 전할 줄 아는 끼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찬 도시를 느낀다. 서울에서 왔다는 나에게 “코미디언 중에 광주 출신이 엄청 많아 부러”, “서울 손님이라 고기를 많이 넣었소, 맛있게 드소”라고 말을 잇는 그녀에게서 호남지방의 향(香)이 풍겨져 나온다. 광주에서 볼 곳과 맛집을 진한 전라도 사투리로 안내해 주는 아주머니의 호의가 즐겁고 감사하다. 이 도시에서 만난 사람들은 남녀노소 하나 같이 싹싹하고 친절하다.


   서울의 명동만큼이나 화려한 충장로를 지나 옛 전남도청을 둘러보고 아시아 문화의 전당에 도착했다. 광주에 이렇게 훌륭한 복합문화전시공간이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광주를 문화도시로 거듭나게 하는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뜩이나 예술인을 많이 배출한 광주에 이런 문화공간이 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무등산의 정기와 드넓은 호남평야는 착하고 멋진 사람들이 사는 아름다운 도시를 만들어 내었다.


   계절의 여왕 5월에 불의에 저항했던 시민들의 함성을 느끼고 싶은 사람들에게 광주를 권한다. 불의에 저항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초석이 되었고, 사악한 폭력에 맞서 싸우려는 용기는 현재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내가 대학을 다녔던 1980년대는 이 도시의 불꽃으로 소용돌이 쳤음을 다시 생각하는 5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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