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대한민국이 광복을 맞은 지 71년이 되는 해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독립투사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불투명했을지도 모른다. 특히 3·1운동 이후 조국의 광복과 자주정신을 위해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우리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다.

  임시정부는 수립 이후부터 1945년 광복까지 일제의 눈을 피해 중국 이곳저곳을 옮겨 다녔다. 그들의 마지막 거처는 중국 중경이었으며 임시정부 요인(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중경에서 조국의 광복을 맞았다. 그러나 감격스러운 순간도 잠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당시 정식 정부로 인정받지 못해 정부 요인과 군인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리고 중경을 떠나는 전날 밤,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 23인이 각자의 감회와 포부를 붓으로 새겼다.

  그 휘호가 바로 『재유기념첩(在諭記念帖)』이다. 재유기념첩이란 임시정부 요인들이 국민들에게 훈계하는 말들을 담은 기념첩이란 뜻이다. 이 기념첩에는 대동단결(大同團結), 자립(自立), 자유(自由), 신사상(新思想) 등이 강조되어 있다.

  이 첩으로 요인들의 필적을 살펴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요인들이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면서도 그들이 근본적으로 품고 있었던 의식을 살펴볼 수 있다. 그리하여 본지는 이 첩자를 소개하여 그들의 필적을 살펴보고 그들의 정신을 계승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재유기념첩에 있는 23인의 휘호 중 △김구 △이시영 △조소앙 △신익희 △윤기섭 필적을 담았다. 현재 이 기념첩은 본교 한국기독교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사진 및 설명 출처:한국기독교박물관)

 

惟誠動天 至誠感神 (유성동천 지성감신)
“오직 정성이 하늘을 움직이고 지성이 신을 감동시킨다”

이시영(李始榮) (1869년~1953년)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다. 1910년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자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강습소(후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1919년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법무총장·재무총장을 역임하였고 1929년에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가했다.
  1945년 8·15광복과 더불어 귀국하였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 초대 부통령을 역임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의 실정과 부패를 성토하는 성명서를 구회에 전달하고 부통령직을 사임한다.

 

不變應萬變 (불변응만변)
“변하지 않는 것으로 온갖 변화를 감당한다”

김구(金九) (1876년~1949년)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다. 3‧1운동 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고 경무국장‧내무총장‧국무령을 역임하면서, 1928년 이시영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여 총재가 됐다. 이로부터 항일무력활동을 시작하여 이봉창, 윤봉길 등의 의거를 지휘하였다.
  광복 후 귀국하였으나 임시정부가 미군정으로부터 정부로서의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였다. 이후 미국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하였으며 1948년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국제연합의 결의에 반대하여 남북협상을 제창하였다.

 

均天下之智富權 (균천하지지부권)
“세상의 지혜와 부에 대한 권리를 균등하게 하라”


조소앙(趙素昻) (1887년~1958년)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다. 1919년 3·1운동 후 중국으로 망명,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하여 국무위원 겸 외무부장 등을 지내고, 제네바에서 열린 만국사회당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임시정부의 승인을 얻었다. 이후 임시정부 요인으로 활동하다 1930년에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다.
  광복 후에는 귀국하여 국민의회를 조직하고 한국독립당의 부위원장이 됐다. 1948년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김구 등과 남북 협상에 참가하였다. 제2대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전국 최고득점으로 당선되었으나, 6·25전쟁 납북(강제로 북조선에 납치되는 것)됐다.

 

獨立尙未完成 我等仍順努力 (독립상미완성 아등잉순노력)
“독립은 아직 미완성이니 우리들은 여전히 노력해야한다”


신익희(申翼熙) (1894년~1956년)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다. 일본에게 국권을 뺏긴 이후 동료들과 독립운동의 방향을 논의하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오는 도중 평양에서 3·1운동을 목격하였다. 그 해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수립과 동시에 내무차장·외무차장·국무원등을 역임하였다.
  광복과 더불어 1945년 12월 1일 임시정부 내무부장 자격으로 환국하였다. 귀국 후에는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노선을 달리하여 이승만과 가까이 지냈으나 이후 이승만과 다른 길을 갔다. 1950년에는 제2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 낡은 집 무너지매 새 집 지으려고 온갖 셈 닿이어 놓고 옛 터 두루 살피어 보니 터는 좋다마는 가시덩굴 적지 않소라”, “날랜 연장 잡았으니 그 무엇 걱정하랴”


윤기섭(尹琦燮) (1887년~1959년)
  독립운동가이다. 1908년 안창호의 지도 하에 최남선, 김좌진 등과 청년학우회를 조직, 민중계몽과 민권신장운동에 진력하였다. 1923년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장에 선출되었다. 1935년 난징에서 김규식, 신익희 등과 한국혁명당을 조직, 독립투쟁전선의 통합에 노력하였다.
  8·15광복 뒤 귀국하여 1946년 좌익세력의 연합조직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의장단의 부의장·상임위원을 지냈다.

 

저작권자 © 숭대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