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6월, 숭실은 한국 최초로 대학 졸업생 2명을 배출했다. 서양의 오랜 대학 역사와 수만 명의 졸업생 배출과 비교하면 보잘것없는 일이다. 하지만 넘치는 부자에게는 금은보화가 특별히 귀할 것 없지만 배고픈 백성에게 한 벌의 옷과 한 그릇의 죽은 고맙고 감사하기 그지없는 법이듯이, 신학문 수용이 늦어지고 문명개화가 지연되며 외세의 침탈로 국권이 유린당하는 상황에서 정규 대학교육 출범 및 졸업생 배출은 당대 암울했던 시대를 비추는 횃불이요 국가의 자주부강의 첩경으로 인식되었다.

  숭실대학 초기 졸업식은 지금과 달리 매우 특별하게 진행됐다. 매년 6월이면 평양성 내는 대학 졸업장을 앞세운 행렬로 시끌벅적했다. 졸업식 첫날이면 학사복에 사각모를 쓴 졸업반 학생들이 인력거를 타고 성 안을 일주하였다. 학부형들은 거리마다 축하의 송문(松門)을 세워 졸업식을 맞이하였다. 졸업 축제의 시작이다. 이런 졸업축하 행사가 1주간 계속되어 ‘졸업주간’이라 불릴 정도였다.

  1914년 숭실대학 제5회 졸업식은 6월 7일부터 11일까지 5일간 거행되었다. 주일날인 6월 7일 김창준 등 졸업반 학생 6명은 평양시민의 환영 속에 평양성을 일주하고 14시 30분 장대현교회에서의 강도(講道)에 참석했다. 졸업예식의 본격 시작이다. 8일에는 20시 장로회신학교에서 대학생 연설회 및 시상식, 9일에는 10시 졸업반 학생 4인의 연설회, 20시 1천여 명의 청중이 참석한 축하 음악연주회, 10일에는 10시 졸업생 식목행사, 14-17시 전숭실 운동회, 20시 숭실중대학생 친목회가 개최됐다. 마지막 날인 11일에는 10시 평양 유지 인사, 기독교 신자, 학부모 등 2천여 명이 남산현예배당에 운집한 가운데 음악대의 연주와 함께 학사복을 입은 졸업생이 식장에 입장하면서 졸업식이 거행되었다. 이날 15시 30분 졸업생 고별예식을 끝으로 5일간의 졸업 행사가 마무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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