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한낮에 비가 내린다
더러는 모른 채 젖어가고
가만히 선 그림자만이 몸을 떨고 있다
어딘가 온기가 남아 있는 까닭은
불어오는 바람이 귓바퀴에 휘파람처럼 스며든 탓이다
그 바람에 어제의,
그리고 조금 더 어제의 네가 있을 까닭이다
그 한낮에 비가 내린다
길어진 해의 끝에 불콰하여 술집 문을 나서도록 하는 것은
미닫이문을 비껴 열고 담배를 피우던 길가의,
어느 귀퉁이의 조악한 나무의자에 네가 앉아 있던 까닭이다
어쩌면 모른 채 젖어 있던 너였는지,
너의 그림자였는지 상기하며
목소리는 잃고 고개만 주억거리기 위함이다
뵈지도 않는 그 물방울에
겉이 닳아 맨들맨들할 수첩의 속마저 젖고
눌러쓴 잉크가 울컥 번져간다
전할 수 없는 글귀들이 형태를 잃고
나조차 잊어 쉬이 읊을 수 없는데 그래도 아직은 가느다랗게
웅얼거릴지도 모르는, 그 한낮에 비가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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