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11월 시작된 광주학생항일운동은 이듬해 3월까지 전국으로 확대되어 5만명이 넘는 학생들이참여한 대규모의 항일운동이다. 학생들은 ‘일본 제국주의 타도’ ,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로 나섰다. 

  숭실대학의 재학생 역시 학생운동에 참여하여 평양 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29년 12월 14일 시험에 불응하고 백지 답안을 제출하며 동맹휴교에 돌입하였고 곧이어 4학년을 중심으로 궐기하였다. 1930년 1월 12일에는 평양 각 학교의 재학생 1,600여명이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고 이어서 1월 21일 숭실대학을 필두로 시내 12개 학교가 만세를 부르면서 가두 행진을 전개하였다. 평남 학무국에서는 이들 학교에 휴교령을 내리고 학교와 시내 각처에 경관을 배치하여 학생들을 검거하였다.

  더불어 평양경찰서에서는 경관 50여명을 보내 숭실대학 기숙사를 포위하고 학생 16명을 검거하는 동시에 기숙사를 수색하여 서류 등을 압수하였다. 경찰은 이들이 태극기를 만들고 격문을 배포하며 만세운동을 주도했다고 지목하고 엄중 취조하였다. 이처럼 한 달 넘게 지속된 만세운동으로 인하여 평양 각 학교 학생이 검거된 수는 1930년 1월 25일 현재 173명이었는데 이 중 숭실대학 재학생이 67명, 숭실중학 재학생이 40명에 달하였다.

  2월 3일 평양시내 학교 중 숭실대학이 개학을 가장 늦게 하였다. 재적생 96명 중 56명이 만세운동으로 구금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결석생을 제외한 19명의 학생들만이 쓸쓸한 개학식을 치렀던 것이다. 이 때 교내응접실에 사복 경찰이 들어와 있었고 교문 밖에서는 정복 경관이 교내를 감시하였다.

  한편 평양에서 검거된 학생들이 모두 가출옥한 이후인 2월 17일에는 1차 송국되었던 9명의 학생이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이 중 숭실대학 재학생인 강기순, 차정근, 윤재만, 홍희선, 김병두 이상 5명은 구속되었고 김양선, 김봉덕 그리고 숭실 중학교 재학생 강한식 이상 3명은 미체포로 불구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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