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직업을 ‘거짓말을 파는 일’로 소개하는 두 남녀가 있다. 연기자 지망생 은희(한예리)와 일본에서 온 소설가 료헤이(이와세 료)의 첫 만남이 바로 그렇다. 영화 <최악의 하루>는 주인공 은희가 서촌부터 남산까지 걸어오는 길의 시뮬레이션과 같다. 그러나 이 길은 카메라를 통해 중계되는 여타 영화의 방식과 다르게 소설가 료헤이의 내레이션으로 그 시작과 끝이 완성된다. <최악의 하루> 속 은희는 연극배우이자 이 영화의 주연 배우이다. 동시에 그녀는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영화는 계속해서 은희를 오롯이 하나의 캐릭터로 고정시키지 않는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일본인 소설가 료헤이, 동갑내기 남자친구이자 배우인 현오(권율), 과거의 연인이 되어 버린, 그러나 연을 끊어내지 못한 윤철(이희준)과 만나는 은희는 전혀 다른 성격의 여성처럼 표현된다. 마치 연기를 하듯 말이다.

  영화는 이 속에서 어느 한 쪽과의 관계도 분명하게 끊어내지 못하는 은희의 모습에 주목한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은희의 양다리가 초래한 인물들의 삼자대면이 단순히 사랑이나 치정에 대한 폭로가 아니라는 것이다. 마치 파국을 맞이하기 위해 존재하는 하나의 연극적인 장치로써 성격이 강하다. <최악의 하루>가 조명하는 것은 개인에 대한 질타나 사랑에 대한 안타까움이 아니다. 사랑 후에 남는 무언가다. 동시에 영화는 사랑 후에도 남아있는 것이 자기자신뿐임을 역설한다. 윤철을 사랑했던 은희와 현오를 사랑했던 은희는 성격조차 정반대이다. 그러나 둘 중 어떤 은희의 모습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알 수 없다. 인간이라면 응당 가면을 쓰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속에서 어떤 나의 모습이 더 진실한지 판가름하지 않는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료헤이와 은희의 만남이 가장 진실되게 다가오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짧은 단어가 관통하고 있는 내면은 자기자신을 그 자체로 인정하며 끝이라는 마침표를 찍을 수 있게 돕는다. 최악의 하루를 걷어낸 자리에는 스스로의 나와 시작이 존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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