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서울 배재고보 운동장에 소나무 기둥을 깎은 골대가 세워졌다. 그리고 축구경기를 갖기 시작했다. 공식적인 축구대회는 1921년 조선체육회와 평양기독청년회가 각각 주관하여 개최한 전조선축구대회가 처음이다.

  첫 대회는 경기규칙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던 터라 대진표 없이 제비뽑기로 상대팀을 가렸고 심판의 경기운영에도 미숙함이 많았다. 조선체육회 주최 청년단 준결승전 숭실구락부와 배재구락부의 경기는 심판 판정 시비로 양 진영의 편싸움이 일어나 결국 우승팀을 가리지 못했고, 평양기독청년회 주최 청년단 준결승전 숭실대학과 천도교청년회의 경기 역시 심판에 대한 거친 항의와 분쟁이 일어 경기가 중단되고 말았다.

  숭실대학이 전국대회에서 거둔 첫 우승은 1923년 평양기독청년회 주최 제3회 전조선축구대회에서였다. 학생단은 7개 팀, 청년단은 10개 팀이 자웅을 겨룬 이 대회에서 학생단에서는 숭실중학팀이, 청년단에서는 숭실대학팀이 우승했다. 조선의 최강팀 숭실대학과 결승전에서 맞붙은 불교청년단은 전반전에 두 골을 허용하자 맹렬한 기세로 몰아붙였고 부상자가 속출하여 골키퍼 포함 총 7명으로 막강한 숭실대의 11명을 상대해야 했다. 결국 우승의 영예는 숭실대학으로 돌아갔다. 1923년 5월 2일의 일이다.

  당시 경기는 룰이 엄격히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고의적으로 태클을 하는 이른바 ‘까기’가 볼거리의 하나였고, 수천 명의 관중은 ‘까라’ ‘잘 깐다’라는 원색적인 응원의 목소리로 운동장을 뒤덮었다. 따라서 다수의 부상자가 속출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상대편 선수를 부상당하게 함으로써 수적 우위를 확보, 승리를 거두는 것도 주효한 경기전략의 하나였다.

  한편, 제1회 전조선축구대회의 경기는 지금과 달리 60분 시합으로 진행됐고 골로 승부가 나지 않을 경우 코너킥 4점, 페널티킥 3점, 프리킥 1점으로 계산해 점수가 높은 팀이 승리하는 룰이 적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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