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 4월의 어느날 이른 아침, 약관 25세의 젊디 젊은 교수가 평양역에 도착했다. 일본 유학을 마치자마자 귀국한 이 젊은이는 긴장한 모습을 애써 감추며 검은 뿔테 안경 너머로 마중 나온 학생들의 눈을 맞바라보았다. 바로 숭실대학 문학 담당 교수로 부임하는 양주동이다.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영문학과 졸업과 동시에 문단에서의 명성에 힘입어 선배의 추천으로 숭실대학에 부임한 것이다. 

  양주동은 숭실대학 교수 추천을 받았을 때 몇 가지 걱정거리를 안고 있었다. 신앙 문제와 술, 담배 문제가 그것이다. 아직 젊은 객기와 허세로 밤낮 시를 읊조리며 연애를 동경하고 도쿄에서 ‘주당의 거물’로 소문난 그에게 술, 담배를 일절 엄금하고 계율이 엄중하기로 소문난 장로교단 경영의 학교로 부임하는 것은 마음에 걸리는 일이었다. 조선에 이름난 명문학교의 교수직을 눈앞에 두고 번민하던 양주동은 매퀸 교장에게 술, 담배를 끊고 진실한 신앙인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양주동의 이런 다짐은 부임 첫날부터 무너지고 말았다. 부임 첫날 밤 양주동이 1년 다녔던 평양고보 재학생 네 명이 술 몇 병을 들고 그의 셋방에 찾아왔다. 문학얘기가 한창 꽃필 무렵 주전(酒戰) 2진으로 숭실대학생 예닙곱 명이 청주, 탁주를 들고 찾아왔다. 술자리가 이어지고 있을 때 양주병을 든 세 명이 3진으로 급습했다. 어찌 제자들로 이뤄진 술병 사단(?)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사제 간 대작으로 밤을 지새울 기세였다. 학생들은 동년배에 가까운 교수를 시험하고 싶은 마음으로 호기롭게 주전을 청했지만 결국 투항하고 총총히 돌아갔다. 
  이후 양주동은 숭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술, 담배를 드러내놓고는 먹지 않는 착실한 교인이 되었다. 1938년 신사참배 거부 사건으로 폐교될 때까지 10년간 숭실에서 봉직하며 김조규, 김현승, 민병균, 황순원 등 당대의 기라성 같은 문인을 길러 냈으며, 지금까지도 숭실의 스승으로 오랫동안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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