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과정, 진정한 인간이 되는 방법
 
  여러분은 인간을 어떠한 존재라고 생각하십니까? 사실 인간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한 존재입니다. 이 세상에서 어떤 사람도 인간을 완벽하게 정의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고대 철학자들부터 현재 세계 석학들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인간, 즉 자신을 정의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해왔습니다. 오늘 여러분들께 말씀드릴 유교의 지혜도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또 하나의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고자 유교에서 다루고 있는 인간의 실체가 무엇인지 확실히 정리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인간의 실체는 단순한 형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감성과 영혼이라는 정신적인 부분을 포함한 개념을 말합니다. 유교에서는 이러한 인간의 실체를 구체성이라고 이야기하죠.
 
  유교에서는 사람이 전인적인 인간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배움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한 배움의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습니다. 여러 가지 역동적인 변화의 과정이 필요하죠.
 
  예를 들어 인간은 태어나서 계속 넘어지기를 반복한 후에야 겨우 한 걸음을 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먹거나 앉거나 말하는 행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신체를 익숙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끊임없는 학습의 과정을 거칩니다. 즉, 우리가 각자에게 주어진 신체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우리가 달성해낸 놀라운 업적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이 달성해 낸 것입니다. 이는 신체적 차원, 물리적 차원, 정신적 차원, 지적인 차원 등 모든 차원에서 적용됩니다. 이러한 모든 과정들이 모여 우리의 몸이 완성되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정의할 수 있습니다.
 
  “‘현재 여기에’ 존재하는 인간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는 우리가 답해야 할 진정한 유교적 질문입니다. 공자는 인간이 된다는 것을 살아있는 사람, ‘현재 여기에’ 있는 구체적인 사람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실체하는 인간이란 내 옆에 있는 사람일 수도 있고 나에게 말을 거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을 수도 있죠. 그러나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단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내가 무조건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이므로 공자는 자기 이해가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이해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타인에 대한 이해가 앞서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이죠. 이러한 유교 전통의 특별한 관점을 사례를 통해 설명하겠습니다.
 
  ‘효도’라는 부모에 대한 자식의 의무를 생각해봅시다. ‘나’는 부모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난 후 부모로부터 진 빚을 인정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게 됩니다. 부모가 먼저 사랑을 주었기 때문에 ‘나’는 왜 효도를 해야 하는지 배우게 된 것이죠. 다시 말해 ‘나’는 부모로 인해 이타주의적인 사고·행동을 해야 하는 이유와, 이를 발전시켜야 하는 이유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렇듯 사람은 관계를 통해 ‘나’를 만들어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삶에서 수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특정한 상황이나 정도에 따라 각 관계를 다르게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기 이해를 하려면 우리가 맺고 있는 각 관계마다 모든 특징을 다 인식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변화하는 모든 특징도 마찬가지로 모두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중심을 잡아야 합니다. 바다에서 방향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나침반이 필요하듯 우리는 자신에 대한 중심을 잡아줄 수 있는 무엇인가가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는 우리에게 자신을 위한 배움, 위기지학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위기지학, 자신을 위한 배움을 따르다
 
  위기지학이란 자신의 인격 수양을 위해서 학문을 한다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학습은 원래 지식의 습득 및 기술의 내재화를 의미하는데, 여기서 나 자신이 주(主)가 되고 지식 및 기술이 부(附)가 됩니다. 기술은 위기지학으로 이해될 수 있죠.
 
  하지만 공자가 생각하는 위기지학은 이와 다릅니다. 공자가 제안한 것은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지식과 기술입니다. 지식과 기술이 우리 몸의 중추가 될 수 있도록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죠. 즉 지식과 기술이 주(主)가 되고 나 자신이 부(附)가 되는 것이죠. 이는 ‘체화된 학습’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예시를 들어보겠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싶다면 그만큼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바이올린의 운지법을 터득할 수 있겠죠. 여러분이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데 상당한 재능을 가지고 있으며 현재 음악가가 되기 위해 열심히 훈련하고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여러분이 바이올린 연주가의 대가가 되었다면 바이올린은 단순히 악기가 아니라 몸의 일부가 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바이올린이라는 악기를 연주하는 게 아니라 예술적인 감각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게 됩니다. 이때 여러분은 바이올린의 지식을 ‘체화’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연주해야 하는 악기가 바이올린이 아니라 우리 자신, 우리 몸이며 이를 온전히 체화한다고 상상해 보세요. 위기지학을 우리 몸에 대입을 해보는 것입니다.
 
  바이올린을 체화시키듯 우리 자신, 우리의 몸을 체화시켜 자기 이해를 하려면 본인이 어떤 커리어를 갖고 싶은지 고민하는 것에서 끝나면 안 됩니다. 내가 얼마나 성공할 수 있을지 그리고 성공하기 위한 실행 계획을 어떻게 세울지, 어떤 사회적 역할이 가장 만족스러운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합니다. 따라서 자기 이해는 우리의 원초적 의식에 뿌리를 둔 변화하는 행동과도 깊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진정한 유교의 발전은 인(仁)에서 시작된다
 
  유교의 전통은 170여 년간 다른 문화들로부터 소외되어 왔습니다. 유학이 시작된 중국에서조차 유교는 훌륭한 석학들의 먹잇감으로 전전해왔죠. 그러나 지난 30여 년간 유교는 2세대에 걸쳐 부활의 과정을 거쳐왔습니다. 해외의 중국 공동체나 화교 공동체뿐만 아니라 한국, 일본에서도 유교 문화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교의 전통은 논의 및 논쟁의 과정을 겪어 부활의 단계에 서 있습니다.
 
  물론 저는 철학자로서 유교의 문화가 부활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유교 안에는 미래 후손들에게 전해져야 할 가치가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유교적인 사고가 오로지 동아시아가 겪고 있는 특정한 문화 및 문제를 대하는 데에만 제한되어 있다면 이는 유교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게다가 우리는 경제적인 재편성이나 정치적인 통치방식을 변화시키는 방식으로는 유교의 변화를 도모할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정신적인 부활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제가 주장하는 유교의 전통을 살리는 올바른 방식은 유교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가치인 인(仁)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저는 유교의 중심가치인 인(仁)이 전 세계 시민으로서 반드시 갖춰야 할 덕목이자 세상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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