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에 나는 진(眞), 선(善), 미(美) 중에 무엇이 으뜸일까 생각해 본 적 있다. 그때는 최소한 미가 으뜸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착하게 살라는 부모님 말씀 때문에 어렸을 때는 선을 으뜸 가치로, 대학에 들어온 이후로는 진리를 으뜸 가치로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3년 전, 몸이 안 좋아 우울감에 빠져 있을 때 우연히 눈길이 간 화초에서 미의 가치를 발견했다. 이름도 모르고 언제 내게 주어졌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초라한 화초였는데 마침 처음으로 꽃을 피워 낸 순간을 포착한 것이었다. 그때 나는 분명, 생명의 힘과 아름다움이 주는 기쁨으로 깊은 우울을 걷어낼 수 있었다.

  독일의 신학자 폴 틸리히는 인간의 삶이 신에 의해 가장 선한 길로 인도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혹한 현실을 목격하면서 그 신념은 무너져 버렸다. 전쟁의 잔혹함에서 틸리히를 구해 준 것은 책방에서 구한 그림 사진이었다. 치열한 전투를 마치고 막사로 돌아와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그림을 보며 틸리히는 절망과 공포를 이겨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미술관으로 달려가 자신에게 위안을 주었던 그림의 원본을 찾아냈다. 그것은 보티첼리의 <마돈나와 아기, 그리고 노래하는 천사들>이었다. 틸리히는 마치 전기에 감전된 듯 온몸에 전율을 느끼며 그림에 담긴 아름다움에 빠졌다. 그 자리에 오래도록 서서 무언가가 자신을 꿰뚫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아름다움에 구원의 힘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다큐멘터리 <Seymour: An Introduction>에서 미국인 피아니스트 세이모어는 한국전쟁 중에 절망과 공포에 빠진 그 자신과 병사들을 위로하고자 피아노를 구해 100차례나 연주회를 열었다. 총성이 오가는 최전방에서 펼쳐진 그의 연주는 생전에 클래식을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한국 병사들조차 감동의 눈물로 젖어들게 했고 처참한 현실을 이겨낼 힘이 되어 주었다.
 
  이화여대 총장사퇴 시위로부터 시작된 일련의 사태로 우리 사회는 지금 참으로 처참하다. 사리사욕에 찬 추한 행태들이 밝혀지고, 무책임한 변명이 이어져 이 나라의 국민인 것이 수치스러울 정도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멸과 절망을 이겨낼 아름다움이다. 바로, 광화문에 촛불이 가득 찬 이유이고, 자신의 행동에 책임지는 마지막 남은 아름다운 모습을 기대하는 이유이다.
저작권자 © 숭대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