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만들어진 문화콘텐츠는 우리에게 감동을 선사할 뿐 아니라, 시간이 지나도 그 빛이 바래지 않는다. 시대를 관통하는 메시지가 담긴 양질의 문화콘텐츠에 우리는 고전(古典)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고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문화유산으로 삼는다. 문화유산이라는 표현이 거창하게 보일 수 있고 우리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익숙한 문화콘텐츠가 문화유산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있다. 이는 우리 현대인이 ‘문화유산’이라고 부르는 고전 작품을 최신 유행의 것으로 즐겼을 과거인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대중에게 친숙한 주제와 내용을 다룬 모차르트의 오페라는 오늘날로 치면 유명 TV 예능프로그램이나 다름없었으며, 우리가 ‘고전 작품’이라고 부르는 국문학 작품은 당대에는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경우도 허다하다.) 인류 보편의 가치가 담긴 콘텐츠라면, 독창적인 표현을 위한 노력과 고민이 깃든 콘텐츠라면 생명력을 부여받아 다음 세대에게로 전달된다.    

 

  문화콘텐츠에 대한 저작권 문제가 대두된 것은 비교적 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다. 이는 대량 생산과 복제 기술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기 때문이다. 대량 생산 및 복제가 어려웠던 시절에는 누가 어떤 콘텐츠를 제작한다는 것은 곧 그가 제작 기술을 독점하고 있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가령 다빈치의 그림은 다빈치만이 그릴 수 있었으며 미켈란젤로의 조각은 미켈란젤로만이 조각할 수 있었다. 콘텐츠의 제작 과정이나 방법은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졌다. 창작물의 표현 방법은 스승에서 제자에게로 전승되는 비법이거나 가업을 물려받는 자만 알 수 있는 정보였다. 일련의 기술을 가진 창작자에게 비용을 지불할 능력이 있는 자만이 문화콘텐츠를 향유할 수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대량 생산 기술과 복제 기술은 산업혁명과 문화혁명을 동시에 이뤄 낸 셈이다. 누구나 문화콘텐츠 저작물을 쉽고 싸게 누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작물의 생산과 이용의 현대화라는 빛나는 성과에 비해 저작자에 대한 사회적 대우와 법적 보호는 아직도 초라한 수준이다. 
 
  저작물이 문화유산으로 남으려면 콘텐츠의 질이 우수해야함은 물론이거니와 그 사회가 저작물을 어떻게 다루는가도 중요한 조건이다. 저작권의 문제를 우리가 어떻게 다루었는가에 따라 후대가 우리에게 내릴 평가가 결정될지 모른다. 지식정보화 사회를 자칭했으면서도 정작 실제적인 관리에는 미온적이고 소홀한 태도를 가진 사회였다는 평가를 받는다면 부끄러운 일이 될 것이다. 저작권에 대한 논의와 협의는 끊임없이 이뤄져야 한다. 이는 저작물의 종류와 저작권의 인정 범위가 사회 변화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수십 년 전만 해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종류의 저작물(ex: 스마트폰, 스트리밍 서비스 등)을 큰 거부감 없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우리 현대인이다. 다음 세대 역시 우리가 겪은 것 이상의 사회적 변화를 겪을 것이고, 우리보다 더 많고 다양한 종류의 저작물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저작권자에게 응당 주어져야 할 대가와 사회적 보호가 변화를 따라가지 못해 제자리걸음 한다면 그 사회의 문화수준이 높다고 말할 순 없을 것이다. 어떤 사회의 특정 영역을 평가할 때 그 영역의 발달 정도를 가늠하는 지표로 곧잘 사용되는 것은 그 분야의 법이 잘 정비되었는가라고 한다. 저작권법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추후 우리 사회의 문화수준을 판단할 지표가 될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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