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자리는 어디에 있을까? 소설이 우리 삶에 끼치는 영향은 위대하다. 그녀가 쓴 이야기 속에는 진흙처럼 흐르는 화장품과 어머니의 익숙한 목소리, 고향 토지의 정겨운 흙냄새가 담겨 있다. 김애란 작가는 소설 속 이야기에 작가 본인의 경험과 기억이 들어있다고 말한다. 김애란 작가가 말하는 그녀의 크고 작은 경험들을 통해 만들어 낸 ‘소설의 자리’를 들어보자. 

 

 

소설 속 고향의 자리

  안녕하세요. 소설 쓰는 김애란이라고 합니다. 저는 소설가로 데뷔한 지 언 15년이 됐고, 그동안 4권의 책을 출간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4권에 쓰여있는 저의 약력들이 조금씩 다릅니다. 처음 나온 책인 ‘달려라 아비’에는 인천 출생이라고 적었습니다. 저는 인천에서 3살까지 살았고 그 이후에는 충남 서산시 대산면 대산읍이라고 하는 작은 면 소재지에서 살았습니다. 저희 부모님은 두 분 다 시골에 사셨던 분이었는데 저는 어떻게 인천에서 자라게 됐을까요?

  1970,80년대 산업화 물결이 거세지면서 시골의 많은 젊은이가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상경했습니다. 특히 저희 동네에는 인천으로 통하는 뱃길이 있어서 많은 분들이 인천으로 돈을 벌러 가셨습니다. 그즈음에 돈의 흐름을 따라 순진하고 낙관적인 얼굴로 배에 몸을 실었던 총각 중의 하나가 저희 아버지였습니다. 이는 제가 ‘달려라 아비’의 배경으로 쓰기도 했답니다. 특히 타지에서 오는 청년들이 자리를 잡는 동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동네를 배경으로 했습니다. 어머니는 그 당시에 외할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외할아버지와 크게 다툰 후 가출을 하셨습니다. 당장 갈 곳이 없었던 어머니는 아버지가 사시는 인천으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자신과 연애를 하다가 돈을 벌겠다며 타지로 훌쩍 떠나버린 남자친구에게 토라진 감정을 가진 채 말이죠. 인천에 도착해 구불구불한 산동네를 오르며 아버지가 머물던 하숙집을 찾아갔습니다. 그 하숙집에 도착해 아버지의 방을 물으니 누구누구 색시라고 부르면서 아버지가 머무르던 방에 안내해주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TV도 없고 라디오도 없던 시대라 일 마치고 돌아올 아버지를 기다리는 일이 무척 심심해 일기장을 몰래 훔쳐봤다고 합니다. 사실 이 일기장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여기서 며칠만 신세를 지고 어머니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기 위해 떠나려고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그 일기장에는 어머니를 향한 빼곡한 그리움과 사랑이 절절하게 쓰여있는 것을 보고 ‘아, 내가 뭐라고 한 남자를 힘들게 하냐’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 집에 더 오래 머무르게 됐고 엉겁결에 저희 큰언니가 생겼습니다(웃음). 그리고 첫째를 낳고 연년생으로 제가 속한 쌍둥이를 낳으셨어요. 그 조그만 셋방 안에서 세 아이를 키우려고 하니 얼마나 고생하셨겠어요.

  그래서 저는 이 인천의 삶은 기억이 뚜렷하기보다는 이야기로만 들은 어떤 원초적인 공간으로 마음속에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3살 때부터는 대산면이라는 아주 작은 시골 마을에서 살았습니다. 동네에 우체국 하나, 목욕탕 하나 초등학교 하나밖에 없는 아주 작은 동네였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와서 비로소 대도시를 경험했죠. 그러다 데뷔를 하고 책을 출판하게 되면서 출판사에서 약력을 요구했는데, 딱히 깊게 생각하지 않고 인천 생이라고 넣었습니다. 근데 그걸 저희 서산 동네 분들이 엄청 서운해 하시더라고요. 특히 저희 아버지는 동네에서 이발소를 하시는데 이발소 오시는 어르신마다 “걔가 왜 인천 애냐, 서운하다”며 투덜대시니까 아버지도 힘드셨던 건지 저에게 다음 책을 낼 때는 꼭 서산을 넣으라고 하셨고, 저는 다음 책에서 서산에서 자랐다고 적었죠. 근데 그것도 동네 어른들이 만족하지 못하셨고, 또 저희 아버지에게 인천을 빼라고 몇 년 내내 이야기하시니까 힘이든 아버지가 저에게 호소하셨어요. 근데 전 또, “그게 뭐가 중요해요”라고 하며 뾰로통하게 이야기했더니 아버지가 되게 진지하게 “작가가 고향을 등지면 안 된다”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세 번째 책인 ‘두근두근 내 인생’에서는 인천을 뺐습니다. 저는 때때로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 독자 분들이 쓰신 리뷰를 찾아볼 때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제 또래의 인천 독자 한 명이 친구들이랑 술 마시다가 “인천 지역의 특산품은 뭐냐”라는 질문에 “우리 인천 지역의 특산품은 김애란이다”라고 진담 반 농담 반 대답하셨다는 리뷰를 보고 반갑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서 다음 책에서는 다시 인천을 넣었습니다.

  이렇게 두서없게 출생지를 얘기했던 건 어릴 적엔 인지하지 못했다가 나이가 들어 글을 쓰다 보니 고향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졌기 때문이에요. 이를테면 집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나는 충남의 작가지, 충남이 나에게 해준 것은 무엇인가’라는 고민을 해본 적이 있는데 이렇게 고장마다 고유의 특징들이 있는 것 같아요. 통영은 음악가나 예술가가 많이 나오고 충청도는 전통적으로 개그맨들이 많이 배출돼요. 장진 영화감독이 무릎팍도사에 나와서 한 얘기가 있는데, 장진 감독이 충청도 쪽에 급한 일이 있어서 가고 있는데 앞차가 너무 느릿느릿 가길래 화를 내다가 싸움이 붙었다고 해요. 그래서 장진 감독이 “급한데 왜 이렇게 안 비켜주냐”고 했더니 충청도 사람이 “그렇게 급하면 어제 오지 그랬슈?”라고 답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죠. 저는 그걸 보면서 우리 고장 사람들은 참 저렇게 얘기했지 하고 공감했어요. 저희 엄마도 그러세요. 저는 보통 일전에 정해놓은 마감일을 잘 지키지 못해요. 특히 마감이 명절이랑 겹치는 경우가 많아요. 저희 어머니는 음식솜씨가 좋으셔서 일주일 전부터 제가 오는 걸 설레하시면서 여러 음식을 준비해 놓으세요. 근데 제가 결국 마감일을 못 맞추고 명절 당일 날이 돼서야 엄마에게 “엄마, 미안해. 내가 원고를 못 넘겼어. 이번에 못갈 것 같아.” 이러면 막 솔직하게 화를 내시는 것도 아니고 쿨하게 이해하시는 것도 아니고 충정도 화법으로 한마디 하세요. “응. 뭐 괜찮아~ 너 주려고 했던 음식들 다 개주면 돼.”라고요. 제가 어디선가 들은 이야긴데 축구 팀 중에 가장 상대하기 힘든 팀이 이기자고 덤비는 팀이 아니라 비기자고 덤비는 팀이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충청도 화법에는 마치 비기자고 덤비는 것처럼 시치미, 능청, 애들름 같은 것들이 들어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조금은 저도 그 언어에 영향을 받은 부분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작가에게 고향이 있어서 좋은 점은 고향에서 맺은 관계, 정서, 말투 이런 것들이 영향을 끼친다는 거예요. 어떨 때는 고향 덕분에 세계를 느끼는 어떤 기관 하나가 더 있는 느낌이 들어서 좋을 때가 있어요. 그때 배운 말들이나 정서가 민들레 씨앗처럼 우리 핏속에 잠자코 있다가 5년이고 10년이고 지나 그 민들레 씨앗들이 발아하는 듯이 문장 속에서 쏙쏙 튀어나올 것 같다는 생각, 혹은 즐거운 과장도 해봅니다.

 

소설 속 어머니의 자리

 

  제가 시골 읍내에서 자영업을 하는 부모님 아래에서 자랐기 때문에 유복하진 않아도 비교적 어렵지 않게 성장을 했습니다. 그러다 제가 고등학교 졸업할 즈음에 불가피한 어떤 사고가 생겨 집이 휘청했어요. 어느 한 유명한 소설 구절에는 “왜 나쁜 일은 한꺼번에 일어나는가”라는 구절이 있어요. 이게 참 맞는 말인 것 같아요. 한국 어머님들은 맨날 돈이 없다고 앓는 소리를 하시다가도 집에 중요한 일이 생기면 목돈을 내놓는 재주가 있으신 것 같고, 저희 어머니도 몇 번 그러셨어요. 근데 방을 구할 때는 정말 돈이 별로 없으셨나 봐요. 부족한 돈이니 보러 다니는 방마다 시원치 않았죠. 이때 한국 부모들은 새끼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면 미안해하지 않고 화를 내더군요. 엄마는 엄마대로 이상하게 화를 냈고 저도 기분이 상했었죠. 저는 17살 때도 19살 때도 다 자랐다고 착각하고 심지어 25살 때에는 인생이 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자만했어요. 번번이 다 컸다고 생각하면서 돌아보면 참 어렸구나, 철이 없었구나 싶었던 것이 그렇게 머리가 굵어 20살씩이나 먹었는데도 부모가 괜찮은 방을 구해주지 못한다고 낯선 도시 한복판 아래서 입을 댓 발 내밀고 토라진 사춘기 소녀의 얼굴로 속앓이를 부리고 있던 제 시커먼 얼굴이 생각납니다. 

  저희 엄마는 지금은 나이가 들어 꺾이셨지만 되게 미인이셨어요. 시골 동네에서도 알아주는 얼굴이어서 옷 사는 것도 좋아하고, 화장하는 것도 좋아했죠. 그리고 반반한 얼굴의 여자가 가진 교만함 이런 것도 있으셨고, 저 또한 예쁜 엄마를 둔 딸로서 의기양양함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날 작열하는 햇빛 아래서 땀을 흘리며 창백해진 엄마의 모습은 처음으로 못생겼다고 느꼈어요. 땀이 범벅돼서 파운데이션은 진흙처럼 녹아 흘러내릴 것 같고 그날따라 쪽진 머리에 잔털은 왜 그렇게 비집고 나오던지. 

 저는 시간이 흘러 ‘칼자국’이라는 소설을 썼어요. ‘칼자국’은 어머니가 운영하시던 칼국수집을 배경으로 한 자전적인 소설이에요. 내가 언제 ‘칼자국’을 쓰고 싶었을까 하고 되짚어 보니 내 부모가 되게 근사해 보일 때나 자랑스러워 보일 때가 아니었어요. 부모 노동에 빚진 한 줌의 교양으로 머리가 굵어져 자기의 늙은 부모를 굽어볼 때가 있어요. 그럴 때 복잡한 마음이 들죠. 문뜩 대도시에서 땀을 흘리는 어머니의 모습이 못생겨 보일 때 드는 미안함, 연민, 짜증, 신경질, 고마움 그리고 안타까움 이런 것들이 다 섞였을 때 그런 글을 쓰게 되지 않았나 하고 생각해요. 그리고 가족은 제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관계를 연습하고 감정을 배운 곳이라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그 영향들이 제 소설 속에 담긴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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