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겨울방학에 한국장학재단에서 시행하는 동계 집중 근로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원장 선생님께 꼭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 이렇게 편지를 드립니다. 아이들과 꼭 함께 첫눈을 보기로 약속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이 갑자기 바뀌면 아이들의 정서상 좋지 않을 텐데, 정말 죄송합니다.

  1호선 천안방면 봉명역 2번 출구 사거리에 위치한 ‘미림표 버섯요리 전문점’. 그곳이 우리 부모님의 가게입니다. 꽤 맛있다고 입소문이 난 터라 손님들도 많이 찾아오고 요리 프로에서 촬영하러 종종 오곤 합니다. 맛집을 찾으러 온 사람들은 이곳이 맞나 싶어 기웃거리다가도 카운터에 앉아 있는 저를 보면 바로 들어옵니다. 그들은 음식의 버섯을 보며 다른 곳보다 맛있고 싱싱하다고 칭찬해줍니다. 메뉴는 ‘미림버섯전골 10,000(1인 기준)’이 전부였지만, 그런데도 사람들은 길게 줄을 서곤 합니다.
 
  처음 어린이집에서 일할 근로 학생을 뽑을 때 원장님은 아이들이 날마다 색다른 버섯들을 보고 관찰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이유로 저를 뽑아주셨지요. 덕분에 학기 중에는 제 용돈을 잘 벌어 쓸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 제가 들어가게 된 세 살 반 아이들은 제 버섯을 만지작거리긴 했지만 마구 뽑지는 않았습니다. 매일 자라는 버섯이긴 하지만, 이 버섯들은 우리 가족에게 무척 중요한 것입니다.
 
  엄마는 제 머리에서 손님상에 올릴 표고버섯이나 송이버섯이 많이 났으면 하고 바라시지만 안타깝게도 제 머리에서는 엄마가 바라는 것보다 더 자주 팽이버섯이 자라는 편입니다. 마트에서 세 묶음에 천 원하는 비교적 싼 팽이버섯이 나는 아침이면 저는 부드러운 엄마의 버섯 결 손질 대신, 차가운 칼날에 댕강 잘려나가는 버섯을 느꼈습니다. 아침마다 제 머리에서 어떤 버섯이 나는지에 따라 엄마의 기분도 천차만별 달라졌습니다. 독버섯이 나는 날에는 가게도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다행히 독버섯은 한 달에 한 번꼴로 났지요. 원장님도 아실 것입니다. 독버섯이 나면 저는 아이들이 만지면 다칠까 싶어 출근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아빠 말에 의하면 ‘고급 중에 고급으로 치는 버섯의 왕 영지버섯’이 난 날은 10년에 거의 한 번꼴로 나는데, 작년 8월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엄마에게 언니와 오빠 몰래 용돈을 받았죠. 혹시라도 영지버섯이 또 난다면 꼭 원장님께도 선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원장님은 제 이름을 항상 잘 못 외우시고 저를 ‘버섯 학생’이라고 부르시더군요. 제 이름은 버섯이 아니라 오미림입니다. 미림표 버섯요리 전문점의 미림은 막내딸인 제 이름을 딴 것이지요. 제가 요리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가족들은 제 머리 버섯으로 먹고살고 있습니다. 언니와 오빠의 대학도 다 제 버섯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정작 그런데 저는 왜 제 버섯 덕을 보지 못하는 것일까요.
 
  저희 엄마와 아빠는 고등학교를 채 마치지도 못한 채 첫째 언니를 가져 결혼식을 올린 어린 부부였습니다. 없는 살림에 가진 것이 젊음 뿐인 제 부모는 첫째 언니와 1년 뒤 태어난 둘째 오빠를 키워야 했기에 밤낮으로 교대하며 붕어빵 장사를 하셨습니다. 5년 뒤 막내인 저를 낳으러 엄마가 병원에 있을 때도 아버지는 언니와 오빠를 돌보며 길거리에서 붕어빵을 파셨습니다. 붕어빵은 계절을 심하게 타는 장사이지요. 가을, 겨울에는 무척 인기 있었지만 장사가 아예 안되는 무더운 여름에는 가을이나 겨울에 번 돈을 저축해 두었다가 간신히 살았다고 합니다. 저희 어머니는 저녁에 집에 들어오셔서 돈을 세시면서 부채 장수와 우산 장수 이야기를 (만 4세 타고나 반에 있습니다. 혹시 궁금하시면 읽어보세요) 해주시고는 이야기 끝에 항상 붕어빵을 파는 우리의 적은 횟집이다.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엄마는 평소에 항상 즐거움을 추구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저는 저 이야기에서는 전혀 웃지 않았습니다. 회가 붕어빵보다 맛있고 훨씬 비싸므로, 정말 그렇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여자아이가 세 살이 넘도록 민둥 머리이기에 엄마는 저를 병원으로 데려가셨습니다. 피부과에 가야 하는 것인지. 아동발달센터(저희 어머니는 요즘 엄마들처럼 ‘센터’가 붙은 곳을 무척 신뢰하십니다.)에 가야 하는 것인지 잘은 모르셨지만 일단 시내에 위치한 ‘김준모 피부과 전문의’에 찾아가셨습니다. 그냥 김준모 피부과였으면 저희 엄마는 분명 가지 않았겠지만, 엄마는 ‘전문의’가 붙어서 갔다고 하셨습니다. 김준모 의사는 확대경을 제 머리 이리 저리에 갖다 대고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음, 곰팡이는 곰팡이지만 먹을 수 있는… 곰팡이. 한마디로 말하자면 버섯…. 음 따님의 머리에 버섯이 자랄 수 있겠는데요? 뭐, 크게 걱정하실 부분은 아닙니다. 관리만 잘 해주시면 버섯이 썩거나 부패하지는 않을 거구요. 그냥 어머니께서 아침마다 그날, 그날 자란 버섯 정리만 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저희 어머니께서는 그날 진료비를 날렸다고 생각하셨고. 아버지는 재미있다며 껄껄 웃어넘기셨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아침에 일어난 제 머리에는 하얀 새송이버섯이 자라 있었다고 합니다. 언니와 오빠는 그 버섯을 까맣게 색칠해서 초코송이를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그 다음날에는 팽이버섯이 자랐습니다. 처음 버섯이 났던 그 날부터 지금까지 저는 언제나 항상 버섯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제가 몸집이 자라는 것과 함께 머리도 함께 자랐습니다. 몸의 성장과 비례해 버섯이 자라는 범위도 점점 늘어났습니다. 엄마는 김준모가 용하다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일곱 살 되던 해부터 우리 집은 붕어빵 대신 ‘미림표 버섯요리 전문점’을 시작했습니다.
 
  사실 저는 가게가 잘 되는 이유가 결코 버섯이 맛있어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난주에 단체석을 예약하고 찾아온 사람들은 정말 무서웠습니다. ‘건사모’라는 이름의 단체인데 건강을 사랑하는 모임이라는 뜻을 가진, 건강이라면 무엇이든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습니다. 각자의 사정을 들어보면 딱하기는 하지만 대다수가 과학적이지 못한 잘못된 민간요법을 맹신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빠가 서빙을 갔기에 망정이지 제가 직접 서빙을 했으면 저는 그 사람들에게 붙잡혀 버섯 밑동까지 모조리 따이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제 버섯을 탐냅니다. 사실 열다섯 살 때는 그들 중 한 명에게 납치당할 뻔하기도 했습니다. 다행히도 아빠가 그 장면을 보고 구해주셨습니다. ‘내 버섯!’ 이라고 외치신 게 옥의 티였긴 했지만요. 우리 부모님께서 화가 단단히 나신 채로 음식점에 건사모를 오지 못하게 하겠다고 건사모에게 통보했습니다. 그러자 건사모의 회장이라는 사람은 앞으로의 회식은 무조건 우리 가게에서 하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건사모’에서 납치미수범을 제명시키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부모님은 지금까지도 우리 남매에게 건사모 회장이 오면 삼촌이라고 부르라고 시키고 계십니다. 지금도 우리 아버지와 건사모 회장은 서로 무척 사이좋게 지내고 있지요. 회장은 우리 남매와 인사를 하면서도 계속 제 머리를 뚫어져라 보곤 합니다.
 
  그들은 사람의 기운을 받고 자라는 버섯은 기운이 강하다는 이상한 속설을 자기들끼리 만들어내고 그것을 믿고 있습니다. 이러다간 저를 그들만의 종교로 만들지도 모르겠습니다. 버섯교가 될까요? 아니면 제 이름을 달아 미림교를 만들까요? 정말 부끄러울 것 같습니다. 건강에 좋다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먹어치우는 습성을 지닌 이상한 사람들은 어디에나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입니다. 부모님이 저를 호락호락하게 그 사람들에게 넘기지는 않겠지만 사실, 저는 부모님들께서 돈을 좀 좋아하시는 편이라 걱정이 됩니다.
 
  그래서 부모님 몰래 다른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습니다. 처음 일했던 곳은 집 근처에 있는 비눗방울 체험전이었습니다. 집 옆에는 큰 아울렛이 하나 있었는데 지하 1층에서 매니저 오빠는 제 버섯이 아이들에게 호기심을 끌 수 있을 것이라며 흔쾌히 채용해주었습니다. 
 
  부모님은 버섯이 잘 나기 좋다며 비 오는 날에는 항상 저를 우산 없이 밖에 내보내십니다. 저는 머리는 드러내놓고 옷은 젖지 않도록 모자를 쓰지 않고 우비를 입고 외출합니다. 가끔 몇몇 사람들은 비를 맞고 다니는 저를 안쓰럽게 쳐다보곤 했지만 비를 맞으면 죽순처럼 금방 쑥쑥 자라는 버섯을 보고는 웃음을 감추지 못합니다. 짬뽕에 들어있는 목이버섯 아시지요? 뽀글뽀글하게 나는 목이버섯은 비에 젖으면 불어나곤 합니다. 가끔 목이버섯의 주름 사이에 빗물이 고여 그 무게 때문에 머리가 휘청이는 날이 자주 있었습니다. 
 
  “목이버섯 때문에 목이 꺾인다. 버섯 잡네.”
 
  혼자 중얼거린 적도 몇 번 있습니다. 이런 웃지 못할 상황이 비 오는 날에는 버섯들이 너무 잘 자라나기 때문에 자주 일어나곤 합니다.
 
  지난번에는 급하게 단체 손님 예약이 있었는데, 바로 전날, 너무 건조하고 습한 날씨 탓에 버섯이 잘 자라지 않았습니다. 가족들 모두 제 머리만 바라보며 발만 동동 굴렀습니다. 결국, 엄마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셨습니다. 제게 화장실에서 하룻밤만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샤워기를 틀어놓고 저는 욕조에 누워 엉거주춤한 자세로 자게 되었습니다. 뜨거운 물은 버섯을 오히려 상하게 하기 때문에 저는 찬물을 뒤집어쓴 채로 화장실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다음 날 잘 잤냐고 묻는 엄마의 표정은 어제와는 다르게 무척 밝아 보이셨습니다. 제 머리에는 버섯이 잔뜩 나 있었습니다. 엄마는 손님들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며 기뻐하셨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제게 언제나 약속은 무조건 지켜야 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셨지요. 결론적으로 그날 엄마께서는 손님들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셨겠지만, 저는 어린이집에 출근하는 것에 실패했습니다. 밤새 물을 뒤집어쓴 덕분에 심한 감기에 걸렸기 때문이지요.
 
  지난 번 튼트나 반의 가을 소풍 시간에 갑작스럽게 못 가게 된 날 기억하시나요? 바로 그 날입니다. 정말 죄송했습니다. 선생님 두 분이서 열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챙겨야 하셨을 텐데…. 가끔은 이렇게 제가 제 의지와는 달리 컨디션을 조절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버섯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제가 아닙니다. 부모님께서는 가게 홍보에 도움이 되겠다며 저를 ‘세계에서 가장 큰 버섯’으로 세계기네스북에 올리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불과 몇 달 전 세상에서 가장 큰 버섯이 뉴스에 보도되었습니다. 그 버섯은 중국에서 발견되었는데 무게가 82kg에 달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저도 (건강검진 결과를 통해 이미 제 몸무게를 아시겠지만) 통통한 편인데, 저보다도 커다란 버섯이라니. 뉴스를 보며 정말 신기했습니다. 부모님은 그 뉴스를 보며 기분이 무척 안 좋아지신 듯했습니다.
 
  그런데 이쯤 되자 저도 궁금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저것은 진짜 버섯이고 저는 버섯이 나는 여자일 뿐인데 제가 버섯일까요? 저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버섯일까요?
 
  저는 어릴 때부터 버섯에 관해서라면 뭐든 가리지 않고 공부했습니다. 저에게 어떤 버섯이 찾아올지 모르는 하루하루는 무척 흥미롭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스럽기도 했습니다. 초등학생 때는 남자아이들이 자기들도 버섯을 먹고 슈퍼마리오가 되겠다며 제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귀찮게 했습니다. ‘한 입만, 한 입만’하는 아이들을 내쫓아주는 것은 같은 학교에 다니는 오빠였습니다. 엄마가 오빠에게 제 버섯을 잘 지키라는 엄명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용돈을 깎겠다는 말에 오빠는 매일 아침 제게 “야 오버섯 너, 오늘 버섯 간수 잘해라. 쉬는 시간마다 오빠한테 누가 버섯 뜯어가려고 하는지 보고하러 와.” 하고 시키기 일쑤였습니다. 몇 번은 반에 찾아와 제 버섯을 가져가는 것은 ‘절도’라며 친구들을 겁주기도 했습니다. 저는 오빠의 말들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저는 마리오 놀이를 하는 친구들이 생버섯을 먹으면 탈이 날까 싶어서 그냥 오빠가 친구들에게 놓는 으름장을 내버려 두었습니다. 사실 저는 제가 좋아하는 남자아이에게 몰래 버섯을 준 적이 있습니다. 하얀 송이버섯을 비닐봉지에 두어 개씩 싸주었습니다. 이제 와서는 별것 아닌 비밀이지만, 그때는 오빠에게 들킬까 무척 노심초사했습니다. 그 애는 마리오 놀이를 좋아하는 귀여운 남자아이 중 하나였습니다. 짝꿍을 삼학년 일 학기 내내 했는데 아침마다 매일 다르게 자라나는 제 버섯을 보고 그 애는 예쁘다고 해주었습니다. 짝이 된 다음날부터 그 애도 바로 바가지 머리를 하고 왔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우리를 버섯짝꿍이라고 불렀지요. 계속 바가지 머리를 하고 다니던 그 아이는 반이 달라져도 저와 친하게 잘 지냈지요. 그런데 그 애는 육학년 때 다른 지역으로 전학을 가버렸습니다. 그날은 너무 울어서 버섯에 제 눈물을 뿌릴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저는 긴급가족회의를 통해 결국 나중에는 제 뜻과는 무관하게 언니 말대로 “버섯에 장난을 비교적 장난을 덜 칠 것 같은 여자아이들이 많은 ‘여중, 여고, 여대’에 진학해”야만 했습니다. 저희 언니는 꽤나 얼굴이 예쁘장합니다. 가끔 언니의 화려한 색조화장과 풍성한 검은 머리칼을 보면 부러울 때도 있었습니다. 저는 언니와 달리 ‘버섯에 해가 되지 않는 정도로만 하는 화장’을 하라고 하시는 부모님의 성화에 분무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머리와 얼굴에 물을 칙칙 뿌리는 것이 화장의 전부입니다. 제 버섯은 식용버섯이므로 염색은 당연히 해본 적도 없습니다. 사실 저도 여자인지라 무척 꾸미고 싶습니다. 그런데 언니는 가끔 저를 빤히 쳐다보다가 깔깔 비웃곤 합니다. 
 
  “다행이네, 너는 다이어트 하고 싶으면 아무것도 안 먹고 네 머리나 뜯어먹으면 되니까”
 
  언니의 말을 무시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제가 저녁마다 엄마와 버섯 결 손질을 할 때는 곁에 앉아 말했습니다.
 
  “엄마 바짝 깎아. 어차피 맨날 자라나는 버섯이니까 많이 깎아버려. 그거 다 팔면 나 내일 염색하러 갈래.”
 
  저런 식으로 언니는 늘 제 기분을 건드리곤 합니다. 오빠도 다를 바 없습니다. 아빠 말에 의하면 ‘차로 끓여 먹으면 감기에 직방인 상황버섯’이 난 날에는 부모님 눈을 피해 여자친구 목감기를 낫게 해주겠다며 제 머리에서 왕창 뜯어갔습니다. 그래도 하나뿐인 언니와 오빠의 철없는 모습을 보면 부모님이 덜 힘드시도록 저라도 철이 들어야지 싶어서 저는 그냥 집에서만큼은 더욱 조용히 가만히 있습니다.
 
  원장님께서도 첫날 면접을 볼 때 제게 물어보셨지요. 혹시 포자번식을 통해 버섯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옮는지에 대해서요. 사실 버섯은 곰팡이로서 포자번식을 통해 번식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 걱정을 하시는 것이 무척 당연합니다. 저는 아주 어릴 적부터 가끔 밤이 되면 자고 있는 가족들의 방에 살그머니 들어가 보곤 합니다. 혹시나, 제게 버섯 포자가 옮아 가족들의 머리에도 버섯이 날까 봐 걱정되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한 번도 그런 적은 없었습니다. 집에서는 버섯이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저는 항상 습기가 촉촉할 수 있게끔 헤어 캡을 쓰고 생활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엄마는 제 머리에서 버섯이 나기 시작한 그날부터 제 수건과 가족들의 수건은 철저히 분리하셨습니다. ‘어쨌거나 버섯이든 뭐든 곰팡이인데 그게 옮아서 가족들이 전부 피부과에 다니면 그것도 다 돈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제 수건에는 항상 까만 글씨로 ‘버섯 꺼’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누구나 저를 버섯이라고 부르는 것을 편해하는 것 같습니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약간은 서글퍼지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에는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꽃이 되었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아시죠? 저는 버섯으로 불리는 것보다는 “미림아.” 하고 불리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차라리 출석부에 있는 이름을 불릴 때가 기분이 그래도 괜찮은 편인 것 같습니다. 원장님께서도 이제는 버섯학생 대신 제 이름을 불러주시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하도 버섯 취급을 당해 와서 저는 평소 제 자신 스스로가 버섯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버섯이 제 자신이라고 생각한 적은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부모님이 제 이름을 잊지 않고 그래도 미림이라는 이름을 넣어 ‘미림표 버섯 요리 전문점’이라고 간판을 달아주신 것이 감사할 때도 있습니다.
 
  저는 제가 버섯머리를 가진 것에 대한 불만은 없습니다. 오히려 팽이버섯을 저녁까지 길게 길렀다가 머리핀을 꼽으면 얼마나 아름답던지 스스로 화장대 앞에서 감탄한 적이 있습니다. 팽이버섯 기둥 끝에 달린 동그스름한 지붕은 구슬 같아 보입니다. 가끔 언니의 반짝이는 섀도를 몰래 바르면 움직일 때마다 빛이 납니다. 그런데 먹는 것에 장난친다고 들키면 엄마에게 혼나기 때문에 장사가 다 끝난 날에 가끔 할 수 있습니다. 제 소소한 취미생활이지요. 지붕이 커다란 버섯이 나는 날에는, 저는 우산 대신 버섯을 쓰고 가기도 합니다. 가끔 제가 당직을 맡게 되어 저녁 늦게까지 아이들과 함께 있는 날이 종종 있었습니다. 바쁜 부모님의 부탁을 받으면 집까지 아이를 데려다주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은 제 버섯을, 아니 저를 무척 좋아합니다. 제 등에 업혀 갈 때면 버섯을 만지작거리다가 잠이 들곤 할 때도 있습니다. 제 버섯이 모빌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지난번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일하다가 어딘가에 걸려 스타킹이 구멍이 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품 안에 안겨있던 윤이가 그 구멍을 보았습니다.
 
  “선생님, 아포? 아포?”
 
  조그마한 손가락으로 구멍을 가리키며 내게 짧은 말로 묻는 윤이는 정말 귀여웠습니다. 스타킹을 신어 까만 다리에 살이 보이는 것을 아무래도 다쳤다고 생각한 모양이었습니다.
 
  “응 스타킹이 구멍 났네. 선생님 아파요.”
 
  그러자 윤이는 손가락으로 구멍을 토닥토닥하며 호, 하고 입술을 모으고 부는 시늉을 했습니다. 구멍 사이로 찬바람이 자꾸 들어왔지만, 집에 돌아가는 길에 하나도 시리지 않았습니다.
 
  유용하지 못하다고 집에서는 천대받지만 가끔 나는 독버섯은 어찌나 화려한지 모릅니다. 아마 우리 튼트나 반 아이들이 보면 무척 신기하고 즐거워하겠지요. 때로는 손에 닿기만 해도 두드러기가 날 정도로 강한 독성을 가진 독버섯이 나기도 합니다. 그 때문에 아이들에게 직접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정말 안타깝습니다. 이렇듯, 제 버섯머리는 제 자랑거리입니다. 우리 부모님도 제 버섯을 무척 기특해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저는 최근 어려운 부탁을 받았습니다.
 
  저희 언니는 저와 5살 차이가 납니다. 올해 언니는 스물여덟입니다. 4년 사귀던 남자친구와 결혼을 한다고 합니다. 남자친구도 얼굴이 반반하니 우리 언니와 썩 잘 어울립니다. 그런데 결혼이 그렇게 비싼 일인 줄 전혀 몰랐습니다. 알아보니 요즘에는 시청에서도 야외 결혼식장을 대여해주기도 한다던데 언니는 부득부득 우겨서 천안에 새로 생긴 제일 비싼 웨딩홀에 예약을 하고 왔답니다. 결혼식 비용만 이천만이 넘더군요. 그리고 우리 오빠는 올해 스물일곱으로 대학을 마치고 서울에 있는 대학원에 진학하려 합니다. 오빠는 어릴 때부터 욕심이 많았는데 그 욕심만큼 공부를 무척 잘하는 사람입니다. 부모님이 장남은 배워야 한다며 대학원 진학을 응원해주신 것이 오빠가 아무 생각 없이 공부에만 집중했기 때문에 나온 성과이긴 합니다. 이 큰일들을 부모님 두 분이서 감당하시기에 무척 힘드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버섯을 키우는 것 말고는 이 집에서 그렇게 대단하게 하는 일은 없습니다. 기껏해야 재료만 제공해드리는 것뿐이지요. 그간 키워주신 것에 비하면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닐 겁니다. 어린이집에서 일하다 보니, 저는 아이가 얼마나 손이 많이 가고 사랑과 정성을 다해 키워야 하는 존재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저를 이 나이까지 키워주신 것에 대해서만큼은 저는 부모님을 무척 존경합니다. 그런데, 집에서 저는 기껏해야 ‘미래도 없는 이미 남들 다 아는 한글이나 배우러 다니는’ 국문과에 다니는 대학생일 뿐입니다. 엄마는 제 학과를 무척이나 싫어하십니다. 집에서 버섯이나 더 잘 키울 궁리를 하라고 하십니다. 그게 더 장래가 밝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빠와 언니, 오빠도 사회에 나가봐야 별것 없으니 집에서 버섯을 잘 키우라고 자주 제게 말해줍니다.
 
  그래서 저는 가족들의 부탁대로 이번 겨울방학에는 강원도 횡성에 있는 표고버섯 농장에 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곳의 까만 비닐하우스에서 나무에 달린 작은 표고버섯들과 함께 먹고 자고 생활하며 버섯 관리를 도맡아 한다는 조건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가끔 어린이들이 단체로 버섯 구경을 하러 올 때는 버섯에 대해 설명해주는 선생님도 하기로 했습니다. 이런 일들을 하고 사장님께 용돈으로 한 달에 백만 원씩 받기로 했지요. 그래도 꽤 괜찮은 조건인 것 같습니다. 그곳의 비닐하우스의 버섯들은 항상 검은 천에 쌓여 안개 분사되는 물을 맞으며 비닐하우스에 들어있다고 들었습니다. 저도 그런 축축한 환경에서 살아가면 좀 더 많은 버섯이 날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나름대로 부모님께서 버섯농장 사장님과 함께 고안해내신 ‘특별 합숙 아르바이트 겸 훈련’이라고 합니다. 부모님은 제게 부디 제발 버섯을 좀 더 많이 자라나게 하는 생산적인 사람이 되어오라고 하셨습니다. 가족들은 제 머리털이 나는 곳에 버섯이 나니까, 제 팔이나 다리에도 모공이 있으니 버섯이 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는 것 같습니다. 아니, 상상이 아니라 그것이 현실이 되길 바라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솔직히 버섯은 제 머리에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짐을 싸던 중 궁금해졌습니다. 이 부탁은 분명히 가족들이 어렵사리 꺼낸 이야기였겠지요? 저 혼자 이런 질문을 되묻고 생각하는 시간 동안 언니는 제가 이주 뒤에나 갈 텐데 재빠르게 차표를 미리 끊어놓았습니다. 오빠는 제 짐을 들어다가 배웅할 차에 싣고 있습니다. 캐리어 하나에 배낭 하나가 제 짐의 전부입니다. 아빠는 버섯이 잘 나는데 좋을 것 같다며, 매일 하루에 한 번씩 보라고 버섯도감을 사주셨습니다. 버섯도감이 짐들 중에 제일 무겁습니다. 혼자 그곳까지 조심히 잘 찾아가라며 엄마는 벌써 택시비도 넉넉히 쥐여주셨습니다. 차를 타고 가고 택시도 이용하니 버섯농장까지 저 혼자 찾아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족들의 부탁이야말로 정말 어렵지 않게 꺼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느낌이 점점 더 선명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건 아마 가족을 떠나는 시원섭섭한 기분 탓인 것일지도 모릅니다. 사실 가족들을 떠나 있는 것이 처음이니까 무척 설레기도 합니다. 설마, 버섯농장에까지 건사모 같은 사람들이 직접 찾아오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곳에서는 정말 저 혼자뿐일 테니까요. 버섯농장에서는 푹 쉬고 올 겁니다. 버섯은 나무에 붙어살지요. 버섯농장에도 제발 제가 쉴 수 있는 나무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잘 찾아보니까 치악산에 있는 절에는 200년 된 은행나무가 산다고 합니다. 은행나무가 너무 사람들과 인접한 곳에 있어서 유감이지만, 한번 살아볼 법하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아, 제 계획을 어쩔 수 없이 말씀드렸네요. 사실 고백하자면 저는 버섯인간이 아니라 그냥 버섯이 되고 싶습니다. 우리 가족에게 미안하지만 저는 버섯이 될 수만 있다면 돌아가지 않을 생각입니다. 저도 그냥 누군가에게 편하게 달려있고 싶습니다. 우리 가족은 이제 알아서 버섯을 사서 버섯 전골집을 차리겠지요? 제 이름도 간판에서 떼 주겠지요? 차라리 버섯은 다른 곳에서 떼 오더라도 가게 이름은 그냥 언니나 오빠 이름으로 해버렸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버섯치고는 무척 똑똑하니(사람이었으니까요), 처음에는 버섯농장에 가서는 쉽게 버섯들처럼 머릿속까지 조용해지는 것은 힘들겠지만, 좀 지내다 보면 저도 그냥 평범한 버섯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하도 제 머리에서 난 버섯들이 사람들에게 먹히다 보니, 제가 버섯이 된다면 저는 그 누구에게도 먹히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독버섯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냥 독버섯 중에서 이름도, 모양도 그리 예쁘지 않은(물론, 독버섯인 것 치고 별로 예쁘지 않은 것입니다.) 아무도 먹지 않고 싶어 하지 않는 마귀버섯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귀버섯은 누군가가 혹시 먹더라도 독성이 강하지 않아 24시간 내에 회복이 된다고 합니다. 만약의 사태까지 생각한다면 마귀버섯이 되는 게 최선의 선택인 것 같습니다.
걱정이 하나 더 늘어갑니다. 버섯도 곰팡이인데, 곰팡이는 곰팡이의 언어로 이야기하고 있을까요? 만일 있다면 그것을 배워두고 싶습니다. 저는 일단 곰팡이가 되기에는 너무 불필요하게 생각이 많은 것 같습니다, 생각을 내려놓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편지 서두에 원장님께 양지버섯을 선물로 드리겠다고 했는데… 그 약속은 제가 만약 혹시라도 버섯이 되는 것에 실패해 다시 버섯사람으로서 ‘미림표 버섯 요리 전문점’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지키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원장님께서는 제가 분명 겨울 집중 근로에 참여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계셨을 텐데, 이런 가정사 때문에 저는 어쩔 수 없이 근로를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적응시간을 주고 싶기 때문에 새로운 선생님이 오실 때까지는 일하도록 하겠습니다. 제 부모님께는 제 겨울방학 계획을 말씀드리지 말아주십시오. 원장님이 매일 원아의 부모님들과 상담하고, 활동일지를 무척 신경 써서 보신다는 것 알고 있습니다. 다음 학기에는 제가 아이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저는 그래도 버섯일 때보다는 아이들의 선생님일 때 무척 행복합니다. 저도 원장님의 원아가 되어 원장님이 저희 부모님과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싶기도 하네요. 우리 부모님은 무엇을 가장 궁금해하실까요? 부디, 더는 버섯 이야기는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원장님께 고백하건대, 사실 제 꿈은 국어 선생님이었습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즐겁게 살아가는 날을 그려왔습니다. 그런데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제가 선생님으로 불리며 아이들과 함께한 지난 2학년 2학기는 정말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아침마다 밝게 인사해주시던 아이들의 부모님들께도, 항상 먹을 것을 더 넉넉히 챙겨주시던 영양사 선생님, 저를 선발해주셔서 아이들과 다른 선생님들을 만나게 해주신 원장님. 이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아이들이 벌써 너무나도 보고 싶습니다.
 
  다음 학기에는 제가 무엇이 되어 있을지 궁금합니다. 버섯이 되는 것에 실패하면 어린이집으로 꼭 돌아오겠습니다. 그때는 팔다리에도 버섯이 나는 버섯인간이 되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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