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의 발달사

어머니가 케이크를 상자에서 꺼낸다
빈 상자를 식탁 위에 올려 놓으신다
케이크에서 단내가 흘러내린다
단내를 밟으며 나는 걷는다
장판에 발이 닿았다 떨어질 때마다
진득한 소리가 엇박자처럼
허공에 붙었다 떨어진다
어머니는 부엌의 불을 끈다
그늘이 몸을 숨긴다
어둠이 포근하게 일렁인다
자궁 안처럼
케이크의 촛불에 불을 붙이는 동안
가족들 모두 숨을 죽인다
옹기종기 모여앉아
촛불에 환히 빛나는 얼굴들
미지근한 숨소리
촛불 위에서 뒤엉킨다
촛불이 일렁인다
내 맞은편에 놓인 탄생 기념 액자
번들거리는 유리 안
내 탯줄과 손바닥이 갇혀 있다
촛불의 노란빛 한 줄기가 유리 위에
파리하게 흘러내린다

말랑거리는 생일 축하 노래가
장판 위로 곤두박질친다
촛불이 일렁인다
나는 촛불을 끈다
따가운 연기가 단내를 지운다
불을 켜기 전
나는 완벽한 어둠에 몸을 묻는다
스위치 달칵이는 소리와 함께
형광등이 환한 빛을 쏟아낸다
그늘이 모습을 드러낸다
태어날 때부터 내게 기생해 있던,
나와 함께 자라난,
결국엔 나보다 커진 나의 그늘

 

시 부문 심사평

  49편의 응모작 중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오세중의 「틈」과 박예지의 「그늘의 발달사」다. 오세중의 「틈」은 ‘틈’이라는 사이 공간을 매개로 관계의 실존적 의미를 진지하게 드러냈다는 점에서 돋보였다. “사람에게는 사실/빈자리가 두 개나 있어서/하나는 내가 앉고/다른 하나는 네가 앉아야/그 사이의 작은 틈으로/비로소 우리는/人間이 된다.”는 진술은 견고한 사유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시적 세계를 완성하려는 태도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각별하다. 그러나 시적 긴장성과 형식의 완결성이 미흡해 그 의미가 반감되고 있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박예지의 「그늘의 발달사」는 시적 표현이나 완결성의 면에서 크게 흠잡을 만한 곳이 없었다. “장판에 발이 닿았다 떨어질 때마다/진득한 소리가 엇박자처럼/허공에 붙었다 떨어진다”라는 시적 묘사와 “태어날 때부터 내게 기생해 있던,/나와 함께 자라난,/결국엔 나보다 커진 나의 그늘”이라는 시적 진술을 적절하게 조화시키면서 자신과 가족의 삶을 ‘그늘’이라는 이미지로 수렴해가는 능력이 좋아 보였다. 그럼에도 문학청년으로서의 패기와 독자성이 미약하다는 점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박예지의 시를 보면서 문태준의 「그늘의 발달」이라는 시를 떠올리기도 했다. 일종의 영향관계가 있어 보이지만 박예지만의 감성이 녹아 있음을 확인하였다.

  두 작품을 놓고 어떤 것을 당선작으로 결정할지 많은 고민을 했다. 고민 끝에 응모작 전체가 고른 수준을 보여준 박예지의 「그늘의 발달사」를 당선작으로, 오세중의 「틈」을 가작으로 선정하였다. 당선작과 가작이라는 결정보다 자신들의 시에 부족한 면이 무엇인지를 우선적으로 유념하기 바란다. 시의 형식적 실험을 모색한 이준범의 「나를 의심으로 이끄는 것들」과 이효준의 「무덤」이라는 작품도 가능성을 지니고 있음을 아울러 밝힌다. 실용만을 추구하는 현실 앞에서 시를 통해 자신과 세계의 관계를 새롭게 모색하려는 응모자들의 진지한 열정에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최승호(문예창작학과 교수)

 

  시 당선 수상소감

  먼저 부족한 저의 작품을 읽어주시고 당선작으로 뽑아주신 심사위원분들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기대하지 않았던 수상 소식에 기쁨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저는 시를 전공하고 있지만 사실 시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때로는 시를 쓰기 위해 펜을 잡고 몇 시간째 책상 앞에 앉아서 한 글자조차 쓰지 못한 적도 있습니다. 단순히 글 쓰는 것이 좋고 더 많이 배우고 싶어 문예창작을 전공했으나 생각처럼 글이 써지지 않을 때가 대부분이라 좌절도 많이 했습니다. 그만큼 아직도 저는 시가 어렵고 이제 또 어떤 시를 써야 할 지에 대해서도 고민이 됩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런 순간과 과정들이 존재함으로써 현재가 있는 것이고 현재가 있기에 제가 시를 포기하고 싶어도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저는 제 시가 좋은 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저에게서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을 봐주신 것으로 생각하고 앞으로는 좋은 시를 쓰기 위해 더욱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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