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알기로 동서고금을 통틀어 무릇 군주가 백성의 눈이 어두움을 가엾이 여겨, 백성이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문자를 창제하고 새로운 문자에 대한 해설서를 펴내어 문자의 원리와 사용법을 설명하는 것을 나라의 공개적이고 공식적인 사업으로 추진한 것은 한글뿐이다. 한글창제 과정에서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의 역할과 비중이 누가 더 컸느냐의 문제는 학계에서 의견이 분분하게 갈리는 주제이다. 허나 한글이 세종대왕의 주도로, 백성을 위해 만들어진 문자라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이가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이의 고충을 덜어주기 위해 만들었다는 점에서 한글은 ‘배려의 문자’ 혹은 ‘소통의 문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과학적이고 창의적인 문자’라는 사실도 우리에게 크나큰 자긍심을 주기는 하지만, ‘민본정신이 깃든 문자’라는 점이 한글창제의 정신과 가치를 더욱 높여주고 빛내주는 요소가 아닌가 싶다.

  한글을 창제한 건 세종대왕이지만 그 당시에는 ‘한글’이라고 하지 않았고, ‘훈민정음(한글의 개발자료를 담은 책의 제목이자 한글 그 자체를 뜻하는 말)’ 혹은 ‘언문’ 같은 한자어로 표현했다. ‘한글’이란 표기는 한힌샘 주시경이 만들었다. 주시경은 학구열이 대단했던 인물로, 신학문이었던 주산과 지리에 능해 여러 학교를 돌며 강사를 맡았다. 책을 한 보따리 들고 다니며 바쁜 수업일정을 소화한 탓에 별명이 ‘주보따리’이기도 했던 그는 신학문을 가르치는 강사이자 한글을 연구하는 국문학자, ‘국어연구학회’(훗날의 조선어학회)의 창립을 주도한 언어민족주의자이기도 했다. ‘한국어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주시경이 한글을 연구하게 된 계기는 흥미롭게도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게 된 이유,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와로 서르 사맛디 아니할쎄’와도 관련이 있다. 주시경은 어린 시절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는데, 당시 한문 강독법은 한문 원문을 그대로 음독하여 암기하도록 한 뒤, 우리말로 뜻을 풀어주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한문과 우리말은 서로 다르기에 음만 들어서는 그 뜻을 도무지 알 턱이 없다. 세종대왕이 이 점에 착안해 한글을 창제하게 되었다면, 주시경은 한문과 우리말이 서로 다른데 우리말의 체계적인 연구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우리말은 언제까지고 한문을 뒤따르는 2등 언어가 되고 말 것이라는 인식을 하고 우리말 연구에 헌신할 마음을 갖게 된다.

  주시경은 자신의 저서 <국어문전음학>을 통해 “오늘날 나라의 바탕을 보존하기에 가장 중요한 자기 나라의 말과 글을 이 지경을 만들고 도외시한다면, 나라의 바탕은 날로 쇠퇴할 것이요 나라의 바탕이 날로 쇠퇴하면, 그 미치는바 영향은 측량할 수 없이 되어 나라 형세를 회복할 가망이 없을 것이다. 이에 우리나라의 말과 글을 강구하여 이것을 고치고 바로잡아, 장려하는 것이 오늘의 시급히 해야 할 일이다.”라고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밝힌다. 주시경은 1914년 7월 27일, 향년 39세로 죽음을 맞이했는데, 일제가 일제강점기 1938년 제3차 조선교육령으로 한국어 및 한국사 수업을 의무 교육에서 해지, 조선어 과목을 사실상 폐지하고 일본어 교육 및 사용의 의무화 훈령을 각 학교에 지시한 사실과 일제강점기 말기 1942년에 한글 교육 및 사용을 금지하는 정책으로 소위 ‘조선어학회 사건’이 터져 조선어학회 한글학자들에 대한 탄압이 이뤄졌음을 미루어볼 때 주시경은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과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가 휘두르는 폭력과 억압에 의해 몸의 지배는 받을지언정, 정신은 자유로울 수 있도록 한글을 지켰다는 점에서 주시경은 ‘나라의 바탕’을 수호한 위인이며 그의 높은 뜻은 오늘날 우리에게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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