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당시 나라를 잃어 보호받지 못한 것은 비단 사람만이 아니었다. 일제 치하에서 무수히 많은 능과 유적이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했으며 어떤 제재도 없이 무차별적인 발굴이 이뤄지기 일쑤였다. 조선총독부는 일본의 고고학자들에게 의뢰하여 식민지 전역에 걸쳐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진행했는데, 이것은 말이 발굴이지 실상은 도굴과 약탈에 다름없는 일이 자행되었다. 게다가 당시 발굴은 귀금속류 부장유물의 획득이 주요 목적이었기에, 조사과정에서 유적을 훼손하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었다. 한반도 전국 각지에서 발굴한 유물은 조선총독부박물관과 경성제대박물관, 각 지역의 박물관 등의 수장고로 들어갔다. 정말 가치가 높은 희귀유물은 대부분 일제강점기 내내 일본 본토로 불법 반출되었다. 망국의 슬픔과 열패감에 빠진 조선인들은 눈앞에서 일련의 행태가 벌어지더라도 막을 방법이 없어 한숨과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조선총독부 1대 총독 데라우치 개인이 자신의 고향인 야마구치에 조선박물관을 세우고 조선에서 반출한 유물과 서적을 전시한 것만 해도 2,000여점 가까이 된다고 하니, 일제강점기 수십 년 동안 일제가 약탈한 유물의 수가 수십만 점이 훨씬 넘을 것이라는 점은 누구나 알 만한 사실이다. (1965년 한일협정 당시 일본 정부는 우리 정부가 요구한 반환대상의 32%에 그치는 1,431점만을 반환했다. 이마저도 대내외로 알려진 한국 문화재를 집계한 것이고, 개인이 은밀히 보관한 일본 내 우리 문화재는 30만점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의 무차별적인 도굴 행위와 광적인 수집 활동, 자기 사리사욕만을 챙기는 도굴꾼까지 가세하면서 우리 문화재는 변변한 것이 단 한 점도 남아나지 않을 것만 같던 때에, 다행히도 조선에는 간송 전형필(이하 간송)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간송은 24세의 나이에 오늘날로 따지면 수천억 원에 달하는 재산을 상속받은 부자였을 뿐 아니라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엘리트이기도 했다. 간송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하나인 독립운동가 오세창을 스승으로 모셨는데, 서예가이기도 했던 오세창으로부터 ‘문화수준이 높은 나라가 낮은 쪽으로 합병된 역사는 없다’, ‘문화재는 단순한 재화가 아니라 민족의 정체성이 담긴 것이다’라는 가르침과 문화재의 가치를 알아보는 안목을 키우는 훈련을 받게 된다. 간송은 스승의 가르침을 받들어 자신의 평생을 우리 문화재의 보존과 수호에 바친다. 간송은 자기 재산을 일제로 반출되기 전 혹은 이미 반출된 우리 문화재를 사들이는 데에 썼다. 간송은 1938년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 보화각을 세우고 자신이 수집한 문화재를 전시했는데, 간송이 사들인 문화재의 대부분은 현재 대한민국의 국보로 지정된 것이 많다. 만약 간송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우리 옛 문화를 보존하고 연구하는 데에 있어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지 상상이 되질 않을 정도다. 1940년대 일제가 조선어 사용금지와 조선어학회 탄압을 하며 민족말살정책을 펼칠 때, 1943년 6월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간송은 당시 판매자가 제시한 가격의 열 배, 기와집 열 채 값인 만 원에 웃돈까지 더해 사들였고, 6.25전쟁 때는 몸에서 떼지 않고 지켜 오늘에 이른다. 간송에 관련한 수많은 일화 중 해례본 일화만 보더라도 간송이 결코 투자의 개념으로 문화재를 수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간송은 해방 이후 교육 사업에서 막대한 재정사고가 발생해 재단의 빚을 갚느라 가족들이 쪼들리는 생활을 하는 때에도 자기가 수집한 문화재를 팔지 않았다.) 간송으로 인해 우리는 수준 높은 문화와 역사를 증명하는 문화재는 물론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며 신념을 지킨 한 사람의 이야기를 갖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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