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화가 곳곳에 늘어선 카페와 음식점의 간판이 대부분 로마자로 표기되어 있고 한국인이 주로 이용하는 숙박시설과 의류업체의 인터넷 홈페이지에도 영어로 된 메뉴와 설명이 있습니다. 행정기관에서도 기관 이름과 정책 이름에 영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대중가요에도 가사에 영어가 안 들어간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왜 중국어, 일본어, 불어 가사와 랩은 없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학생들도 일상에서 케어, 팩트, 트러블, 컴플레인, 피지컬, 비주얼 등과 같은 영어 단어를 사용합니다. 마치 이런 양태가 더 세련되고 배운 티가 나며 감성적으로 우위에 있는 듯 인식하는 것 같습니다. 이들 단어 대신 사용할 수 있는 한국어 단어가 번듯하게 존재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왜일까요? 강한 언어에서 차용된 단어는 비좁은 사용 맥락에도 불구하고 모국어 단어를 대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문화도 영어의 문화가 드러나는 한쪽 방향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국가들의 탈크레올화와 후기 크레올 연속체로 인한 수많은 원주민 언어의 사멸처럼, 언젠가는 한국어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없지 않습니다.

  한국어가 한국인의 정과 뜻을 펴는 데 가장 편리한 언어이지만 취업, 돈, 미래 등 인생의 중요한 부분과 관련해서 우리는 한국어 대신 영어를 강조하고 강요하게 됩니다. 결국 어느 시점에는 한국어가 가족 내에서만 사용하는 구어로 전락할 가능성, 의례에서만 사용하는 민속 언어로 전락할 가능성, 모국어 화자에게 선택받지 못하는 박탈된 언어가 될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런 일들이 아프리카의 다언어 국가에서 일어났습니다. 또한 필리핀에서 관찰되는 것처럼 언어에 의해 사람들의 계급이 나누어질지도 모릅니다. 아니, 이미 사회의 상위 계층으로 진출하려면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지 않고는 어려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한국인에게 한국어는 그냥 언어가 아닙니다. 민족을 담는 거대한 그릇이며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가진 한 사람 한 사람이 쌓아올린 공든 탑입니다. 그 안에는 대한민국의 역사, 문화, 전통 같은, ‘우리’를 ‘우리’로 구분 지어주는 모든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외국어를 잘하는 것은 좋은 일이고 개인적으로도 자랑할 만한 일입니다. 이 시대에는 다양한 외국어 능력이 필요하기에 이는 권장하고 장려할 만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모국어에 대한 폄하나 훼손으로 이어져서는 안 됩니다. 외국어를 쓰지 말자는 순혈주의, 국수주의, 우리 것만이 우수하다는 자문화중심주의가 아닙니다. 한국어로 대체 불가능한 전문어나 번역했을 때 심각하게 의미가 손상된다면 원어를 그대로 써야 합니다. 간판이나 안내판에도 한국어를 쓰고, 영어, 중국어, 일본어는 병기하면 됩니다. 한국인이라면 남녀노소 누구나 한국에서 한국어만 사용하더라도 아무런 불편 없이 살 권리가 있습니다.

  언어에는 등급이 없고 우열이 없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KBS에서 방송된 적 있는 언어 다큐에서 어떤 부족장의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우리 언어는 우리 사는 곳을 정확하게 말해줍니다. 하루가 낮과 밤, 계절은 건기와 우기가 있을 뿐입니다. 단순하지만 우리 언어가 좋아요. 우리 언어로는 뭐든지 표현할 수 있어요.”

  나온 지 10년도 더 지난 책입니다만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조동일 선생님이 쓴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망상 : 민족문화가 경쟁력이다>와 시정곤 선생님 외 네 명이 함께 쓴 <한국어가 사라진다면 : 2023년 영어 식민지 대한민국을 가다>입니다. 감히 여러분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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