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의 권리라는 개념이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백 년이 되지 않는다. 서양에서 아동권리 역사는 1924년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에서 아동의 권리에 관한 선언을 채택하여 ‘인류는 가장 좋은 것을 어린이에게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선언문에 명시한 것을 기점으로 출발했다고 보곤 한다. 19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어린아이는 ‘보호 받아야 할 존재’가 아니라 ‘자기 몫의 밥벌이를 해야 하는 존재’였다. 문명이 태동하기 시작한 고대부터 어린이들은 노동에 참여하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가사의 소일거리를 돕거나 성인의 노동을 보조하는 정도였다. 허나 영국을 기점으로 산업혁명이 일어난 이후, 산업혁명기 초반에는 정신과 육체가 연약하여 통제하기 쉬운 어린아이를 값싸게 부리기 좋은 노동력으로 치부했다. 자본가는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어린 노동자’에게 살인적인 강도의 장시간 노동을 강요했다. ‘어린이의 권리’라는 개념도 아동학대와 착취, 감금에 대한 법적 처벌의 근거도 빈약했던 시절이었기에 어린이가 어떤 대우를 받는지에 대해 관심 가지는 이는 거의 없었다. 산업혁명의 중심이라는 자부심과 당대 가장 부유한 국가경제를 자랑했지만 그 이면에 있는 아동학대와 착취를 외면한 영국의 병폐는 찰스 디킨스의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영국은 1833년에 와서야 9세 미만의 아동에 대한 노동 금지, 9세에서 13세 사이의 아동은 주 48시간 이내로 노동시간을 제한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아동인권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움직임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그것도 일제의 식민 지배를 받던 일제강점기에 있었다면 놀라운 일일까. 소파 방정환(1899년 11월 9일~1931년 7월 23일)은 ‘어린이는 어른보다 한 시대 더 새로운 사람입니다. 어린이의 뜻을 가벼이 보지 말아주십시오’라고 말하며 평생을 어린이의 교육과 권리보호를 위해 헌신한 인물이다. 방정환이 활동하던 시대의 사회상황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유교 이념과 질서가 중히 여겨지던 분위기였다. 장유유서(長幼有序)의 규범은 가정의 안과 밖 어디서든 통용되는, 가히 절대적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의 원칙이었으며 ‘어른과 아이가 평등하다’라는 생각을 인정해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수직적 관계에 익숙했던 조선인에게 있어 수평적 관계를 제시하는 방정환은 대단히 낯설고 이질적인 인물이었다. 방정환 이전에 ‘어린이’란 ‘생각이 모자라거나 경험이 적어 수준이 낮음’을 의미하는 형용사 ‘어리다’에 인칭 대명사 ‘이’가 붙은 것으로, ‘깨우치지 못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다. (‘아동’과 ‘소년’이라는 단어는 개화기를 거치며 일본으로부터 유입된 것이다.) 방정환은 조선의 미래와 우리 민족의 희망은 아이들에게 있다고 보았고, 1920년대부터 어린아이를 높이 부르는 말로 ‘어린이’를 사용할 것을 제안하여 공식화한다. 우리 역사에서 ‘아동의 권리’는 1923년 5월 1일 어린이날 기념식장에서 ‘소년운동협회’가 선포한 ‘아동의 권리 공약 3장’에서 처음 명시되는데 이 공약 역시 방정환이 구상한 것으로, 1924년 ‘아동권리에 대한 제네바 선언’보다 시기적으로도 빠르고 아동의 권리에 대해서 보다 포괄적이며 깊이 있는 접근을 하고 있다. 
 
  조선인의 역량을 최대한 억압해야 하는 일제의 입장에서 방정환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겠으나, 방정환은 자신을 감시하는 일본인 형사도 감동하여 눈물 흘리게 만들 정도로 뛰어난 동화 구연·창작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소파 방정환은 33세로 짧은 생을 마감했으나, 천대받고 학대받던 아이들을 ‘어린이’로 높인 그의 삶은 언제까지고 빛날 것이다.  
저작권자 © 숭대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